2018년 6월 30일 토요일

이산의책34 창힐의 향연

창힐의 향연—한자의 신화와 유토피아
다케다 마사야 지음/ 서은숙 옮김
2004.12.24/ A5신 304쪽/ 13,500원/
 ISBN 89-87608-42-5

'네 개의 눈'을 가진 신화적 존재 창힐이 만들었다는 한자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중국인들이 겪었던 고충과, 그 고충을 희열로 나아가 문자의 향연으로 바꾸려 애썼던 '인간 창힐'들에 대한 이야기. 기발한 발상과 분방한 상상력으로 한자와 중국어의 역사적 여정을 돌아보는 기회를 주는 책. 

● 편집자 서평
한자의 기원과 창힐
한자는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유일한 고대문자이다. 실존하는 자료로서 가장 오래된 한자는 1903년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중국 은나라 때의 갑골문자로, 이것은 기원전 14~12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자의 정확한 기원 및 역사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창힐은 이렇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한자의 기원과 관련해서 중국의 여러 고적(<한비자> <여씨춘추> <회남자> <설문해자> 등)에서 "조수(鳥獸)의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만들었다"고 종종 이야기되는 한자창제설의 주인공이다. 물론 창힐은 그 사실성(史實性)이 의심되는 신화적 존재이기는 하나, 여러 기록과 도상에서 묘사되는 그 특별한 외모가장 큰 특징은 '네 개의 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 책 <창힐의 향연>은 중국인이 자신들의 '네눈박이' 선조가 창조한 이 특별한 문자를 익히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통과 쾌락의 기록이다. 다시 말해 '눈이 두 개 부족한' 범인(凡人)들이 한자라는 발명품을 능란하게 다루지 못하고 얼마나 버거워했는지, 그래서 한편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자를 회의 또는 혐오하고 그것과 싸워왔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자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하는 의문에 대해 가히 감탄을 자아낼 만큼 방대한 지식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한자와 중국어의 역사를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고, 사각형 안에 갇힌 문자와 인간 사이에 펼쳐진 애증의 관계를 보여준다.
표의성의 신화와 '달나라 언어'
한자는 가장 전형적인 표어문자(表語文字)이며, 표어문자는 각각의 문자마다 각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바로 이런 한자의 표의성이야말로 전혀 다른 메커니즘의 문자를 사용하는 서양인에게 감탄의 대상이 되었다. 16세기경부터 주로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유럽에 소개된 이 동양 제국의 문자를, 예컨대 1585년 로마에서 간행된 <중국대왕국지>(中國大王國誌)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이 나라에서는 상이한 다수의 언어가 사용되는데, 구두로는 서로 이해할 수 없지만 필기로 하면 널리 일반적으로 통한다는 사실은 정말로 경이롭다 할 만하다. 그 이유는 하나의 기호 혹은 문자가 사람에 따라 상이한 음으로 발음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이 표시하는 사물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중략) 이렇게 함으로써 일본인과 류큐인, 수마트라인과 코친차이나인 그리고 기타 인접지역의 사람들은 중국인과 의사를 소통할 수 있다."
이러한 경탄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서양인들은 한자를 바벨탑의 붕괴 이후 그들이 잃어버린 '아담의 언어'에 필적할 만한 '보편의 언어' '진정한 문자' '철학적 언어'의 후보로까지 거론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어 특유의 성조(聲調)와, 17~18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SF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달나라 여행담에 묘사된 달나라 언어의 '음악적' 특징 사이의 유사성은 서양인의 눈에 중국이 문자/언어의 유토피아요, 한자/중국어는 유토피아의 문자/언어로 비쳐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마저 가능케 한다.
두눈박이 창힐들의 등장
이와는 반대로 한자에 회의를 품고 있던 중국의 언어학자들은 17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들어온 라틴 알파벳의 표음성에 넋을 잃었다. 읽는 사람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한자의 발음은 중국인들에게 오랫동안 골칫거리였기 때문이다.(방대한 영토에서 사용되는, 거의 외국어나 다름없는 각지의 방언은 이런 문제를 더욱 가중시켰다.) 훨씬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1900년 중국에서 <80일간의 세계일주>가 번역출간되었을 때 지은이 쥘 베른의 이름 표기가 '자오스웨이얼누'(焦士威爾奴) '팡주리스'(房朱力士) '샤오얼쓰보네이'(蕭爾斯勃內) '자얼웨이니'(迦爾威尼) '샤오루스'(蕭魯士) '페이룬'(培侖) '판나'(范納) '웨이난'(威男) 등으로 가지각색이었다는 사실은 중국인이 한자라는 문자체계에 대해 가졌을 고민의 일단을 짐작케 한다.
이런 언어/문자 상의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예로부터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해온 중국인들은 이제 서양의 표음문자에 매력을 느끼고 그 효용성을 역설하게 된다. 명말 청초의 팡이즈(方以智)는 <통아>(通雅)에서 "각각의 사물에 하나의 문자가 있고 문자가 각기 하나의 뜻을 지니는" 한자의 번거로움을 지적하고, "유럽처럼 사물마다 음을 합성하고 음에 따라 문자를 구성하면 음이 중복되는 일 없이 가장 뛰어난 문자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제언한다. 이런 문제의식은 급기야 여러 '두눈박이' 창힐들을 출현시킨다. 그들이 창안한 표음식 신문자는 로마자와 그 변형을 사용한 것, 한자와 그 변형을 사용한 것, 속기기호를 사용한 것, 숫자를 사용한 것, 아예 새롭게 창조한 것 등 다종다양했다. 에스페란토를 강력히 추천했던 베이징 대학 학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1912년 세계어학회 환영회 연설에서 한 말에 따르면, 그때까지 표음문자를 고안한 중국인이 100명 정도라고 한다. 또 이들처럼 구체적인 문자 매뉴얼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탄쓰퉁(譚嗣同)이나 캉유웨이(康有爲)처럼 언어/문자의 개량을 역설하며 미래의 이상적인 중국사회에 대해 구상한 언어 유토피안도 있었다.
현대의 한자, 계속되는 문자의 향연
중국역사상 무수한 창힐들이 등장했으나, 그 누구도 원조 창힐과 같은 신화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보다 조직화되고 정책화된 문자개혁이 시도되었다. 그 일환으로 1949년에 중국문자개혁협회가 수립된다. 그리고 "문자는 개혁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문자의 표음화라는 세계 공통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한자의 표음화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므로 표음화에 앞서 한자를 간략화해 현재의 사용에 도움이 되도록 함과 동시에 다양한 준비를 진행시켜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교시에 따라 표음방식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해서 발표된 것이 오늘날의 '한어병음방안'이다.(이 시기, 그러니까 중국문자개혁협회의 수립 이후 1958년 '한어병음방안'이 공포되기 전까지 수많은 현대판 창힐들이 고안한 무려 1천여 종의 표음문자 방안이 협회로 밀려들었다고 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간략화한 한자 즉 '간체자'와 그 표음체계인 '한어병음방안'이 함께 운용되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창힐들은 여전히 새로운 문자 연구를 멈추지 않고 있다. '한어병음방안' 공포 이후 1980년까지 중국 안팎에서 1,667종의 중국어 표음문자방안이 고안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1980년대 이후 종래의 '한자낙후론'에 반대하며 한자 자체의 우수성을 부르짖는 복고적 움직임도 일고 있다. 한자에 대한 회의 또는 혐오에서 출발한 여정이 결국 한자로 되돌아온 셈이다. 이후 한자가 또 어떤 여정을 걷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한자는 완료형의 문자가 아니라 새로운 전망이 필요한 현재진행형의 문자라는 점, '두눈박이' 창힐은 앞으로도 계속 등장하리라는 점이다. 더욱이 중국이 21세기를 "한자/중국어가 위력을 발휘할 시대"로 상정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지금,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는 중국의 이웃나라들은 계속되는 문자의 향연에 어떤 초대장을 받게 될지 예의주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저자 다케다 마사야(武田雅哉)

1958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하코다테(函館) 시에서 태어났다.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박사과정을 중퇴했다. 현재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 교수이며, 중국문화사·중국문학·중국미술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1994년 산토리 학예상 사회·풍속 부문을 수상한 이 책 <창힐의 향연한자의 신화와 유토피아> 외에 <비상하라! 대청제국>(1989), <저팔계의 대모험>(1993), <별을 향해 떠나는 뗏목>(1997), <중국과학 환상문학관>(공저, 200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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