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유산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참패한 중국은 과거 제국의 영광을 뒤로 한 채 동네북으로 전락했다. 제국주의 열강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중국의 현실을 앞에 두고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은 점점 중국의 전통과 중국적 가치를 거부하며 새로운 가치와 모델을 찾았다. 그들에게는 서양의 '민주주의'와 '과학'이 중국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방안으로 보였다. 그러나 베르사유 강화회의의 결정이 중국에 내셔널리즘적인 분노를 야기하면서 근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이 무렵 일부 지식인들은 러시아 혁명이 제시하는 반(反)제국주의 세계혁명에서 새로운 비전을 발견했다. 중국의 지식인에게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중국의 낡은 전통과 제국주의의 지배를 모두 거부할 수 있는 길이었다. 원래 마르크스주의에서 내셔널리즘의 운명은 사회혁명의 목적에 그 자리를 내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중국의 지식인들은 애당초 내셔널리즘적인 열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기 때문에,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내셔널리즘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내셔널리즘의 터널을 지나면서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회주의적 비전에 도달한다. 그것은 사회혁명과 국가의 독립 그리고 부강(富强)이었다.
마오쩌둥과 마오주의
중국혁명은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고 강철 같은 단결을 유지한 혁명가들과 대중의 공동작품이지만 그 주역은 단연 마오쩌둥이다. 마오쩌둥이 중국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간적인 장점, 즉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 명민한 두뇌, 탁월한 리더십, 타인을 사로잡는 카리스마 등에 힘입은 바 크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훗날 마오주의(Maoism)라고 불리게 된 그의 사상이었다. 따라서 중국혁명사 나아가 중국현대사를 꿰뚫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마오주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테면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1949년 이후의 역사만 보더라도 중국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나라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수십 년 동안 절대평등을 추구하다가 어떻게 그토록 순식간에 부자가 되기 위해 혈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라고—물론 '사회주의' 앞에 '시장'이라는 말을 붙이긴 했지만—주장하는 중국공산당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런 의문들을 풀어주는 실마리를 우리는 마오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마오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혁명에 있어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나라에서만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부정하고 인간의 의지와 사고(思考)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마오주의의 이 주의주의(主意主義)적 관점은 마오쩌둥이 혁명의 고비 때마다 그리고 정치적 위기 때마다 대중을 선동하고 대중의 역량을 결집시키는 대규모 대중운동을 전개하여 상황을 반전시키는 강력한 무기가 되곤 했다. 혁명 초기에 노동운동 중심의 계급혁명이 참혹한 실패로 끝나자 마오쩌둥이 혁명의 주력을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농민으로 설정하여 결과적으로 혁명에 성공한 것은 중국의 경제적 후진성과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 즉 대중의 혁명의지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마오주의의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는 내셔널리즘의 경향이다. 젊은시절 마오쩌둥이 5∙4운동에 참여한 것은 베르사유 강화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애국적인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훗날 코민테른에 반기를 든 것이나 공산당 계열이 아닌 중도적인 여러 민주 정파들과 지식인을 인민공화국에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이나 소련과 대립하게 되는 것, 이 모두가 기본적으로 마오주의가 내셔널리즘에 경도되어 있었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상과 같은 두 가지 특징에 더하여 마오주의는 절대평등의 유토피아를 추구하고 있다. 이것은 주로 마오쩌둥 말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유토피아에 대한 추구가 마오쩌둥 개인의 몰락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회주의 실험을 파국으로 몰고가는 요인이 된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평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당대(當代)에서 아직 논란이 분분한 인물에 대해서는. 그 중에서도 마오쩌둥은 아마도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이 책에서 모리스 마이스너가 내리는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가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답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빼어난 통찰력을 보여준다.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마오쩌둥에 대한 온갖 덧칠—무조건적인 비판이나 찬양—을 벗겨내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마오쩌둥의 의도를 균형 있게 감안한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에 '부강'과 '평등'을 동시에 가져오고 싶어 했다. 그래서 부단히 근대화를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격차를 없애려고 했으며, 고급 의료 서비스보다는 예방의학을 엘리트 교육보다는 평등교육을 추구했다. 마오쩌둥의 최대 실정(失政)으로 꼽히는 농촌의 급진적인 인민공사화, 무모한 대약진운동, 광란의 문화대혁명도 실은 사회적 차별을 최소화하고 공산당의 관료주의화를 억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마이스너는 이처럼 마오쩌둥의 선의(善意)를 관대하게 인정하면서도 평가만큼은 냉정하기 그지없다. 무릇 정치가는 의도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 평가받는 것이라고. 따라서 마이스너가 보기에 마오쩌둥의 최대 업적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중국이 근대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그 증거로서 저자는 마오쩌둥 시대 중국경제는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파괴 속에서도 성장을 계속해 나갔다는 통계자료를 제시하고,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마오쩌둥이 이룩한 근대화의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덩샤오핑과 시장개혁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처럼 중국을 근대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국가로 만들겠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 있었지만 마오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굳이 분류한다면 마오쩌둥에게 숙청당한 류사오치(劉少奇)처럼 레닌주의자에 가까웠다. 실제로 마오쩌둥이 생전에 덩샤오핑은 "나에게 상의 한 번 한 적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더구나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의 피해자였고, 문화대혁명의 수많은 피해자들(주로 당 간부, 정부 관료, 도시의 지식인과 청년)의 지지를 등에 업고 권좌에 오른 만큼 마오주의를 비판하고 마오쩌둥과 자신을 차별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마오쩌둥을 부정한다는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덩샤오핑의 선택은 마오쩌둥의 공과를 구분해서 '공'은 계승하고 '과'는 털어버리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천안문 앞에 걸어 놓은 것은 단순히 그냥 걸어 놓은 게 아니라 우리를 승리로 이끌고 우리나라를 건설한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라는 덩샤오핑의 말은 그의 의중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즉 마오쩌둥을 혁명전통과 내셔널리즘과 근대화의 상징으로만 보존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정치적 잘못과 급진적인 유토피아 사상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마오쩌둥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덩샤오핑이 치켜든 기치는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이었다. 정치개혁은 바로 민주주의를 뜻하며, 경제개혁은 계획경제의 수정, 즉 시장개혁을 의미했다. 마오주의 시대의 방식과 경제성장 속도로는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덩샤오핑은 과감하게 대외개방정책을 실시하여 외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여 전지구적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그것은 곧 과거의 평등과 분배방식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철밥통을 깨부수라"는 구호와 이제부터 "누군가 먼저 부자가 될 것이다"라는 그의 말에는 그가 추진하는 시장개혁의 본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어쨌든 덩샤오핑의 경제개혁은 외형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정치개혁은 사정이 달랐다. 덩샤오핑과 그의 동지들은 공산당의 무오류성을 신봉하는 레닌주의적 신념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당 독재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당의 통제를 받지 않는 어떤 독립적인 사회단체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덩샤오핑의 정치개혁 약속은 말잔치에 불과했다. 덩샤오핑의 정치개혁에 대한 실망과 경제개혁의 부작용에서 비롯된 민주화의 열기는 1989년 6월 천안문 광장에서 극적으로 표출된다.
중국은 어디로
참혹한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린 1989년의 천안문 사건은 덩샤오핑 정권 하의 중국사회의 현주소를 잘 말해주고 있다. 덩샤오핑의 경제개혁은 전반적인 소득증가에 따른 소비의 증가를 낳음으로써 중국경제에 전례 없는 경제적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 과정에서 덩샤오핑의 말대로 일부가 먼저 부자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부의 부자들 가운데 대부분이 공산당 간부나 그들의 자녀 친척 친구들이었다는 점이다. 즉 건전한 부르주아지에 의해 부가 창출된 것이 아니라 관료의 권력을 이용한 부정축재가 초기 자본축적의 중심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인민들 사이에서는 당 간부와 관료들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져갔다. 더구나 현실에서 직면하게 되는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실업의 공포는 그들의 생활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과거의 사회복지혜택은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으며 빈부격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벌어지고 있었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근절되었던 온갖 사회범죄도 되살아났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불만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이 위기를 군대를 동원하여 정면돌파하고 경제개혁에 더한층 박차를 가했다. 실종된 정치개혁의 빈자리는 대대적인 애국주의 열풍으로 대체되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전 중화권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중국 내셔널리즘은 민주화에 대한 욕구를 완전히 잠재워버렸다. 지금도 중국공산당은 인민들에게 경제적 자유만 허용하고 정치적 자유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런 현실에 대해서 중국인들은 별 불만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중국의 사회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으며 특히 도시와 농촌의 노동인구는 중국의 국내시장과 공산주의 국가 그리고 세계경제라는 삼면의 공격 앞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고 진단한다.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아직은 산발적으로밖에 표출되지 않는 이들의 불만이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중국공산당을 언젠가는 벼랑 끝으로 내모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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