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30일 토요일

이산의책22 왕 여인의 죽음

왕 여인의 죽음
조너선 D.스펜스 지음 / 이재정 옮김
2002년 5월 13일 발행 / 256쪽 / 값 10,000원


중국의 탄청이라는 작은 현에 살았던 다양한 민초들의 삶을 통해 당시의 인구, 세금, 법률, 여성문제(결혼·정절·이혼 등), 귀신문제, 시장, 감옥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청대 사회를 이해하는 소설 같은 역사서.

왕 여인은 누구인가
이 책의 지은이 스펜스는 도서관에서 자료를 검토하던 중에 우연히 '왕씨'(王氏, 중국의 모든 공식 기록은 여자의 성명을 기록할 때 설령 이름이 있다 하더라도 성씨[姓氏]만을 적었다)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때는 17세기 후반(1668~1672년경), 장소는 중국 산둥(山東) 성의 아무 내세울 것 없는 가난한 고장인 탄청(郯城) 현. 왕 여인은 다 쓰러져 가는 방 한 칸 짜리 집에 사는 아주 가난한 농촌 아낙으로, 남편 런(任)은 품을 파는 농업 노동자였고, 자식은 없었다. 그녀는 어느 날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갔다. 그런데 얼마 후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녀는 홀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차마 집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서 처음에는 마을 도관(道觀)에 잠시 몸을 의탁했는데, 그녀가 도관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도사(道士)의 주선으로 다시 남편에게 돌아갔다. 남편은 돌아온 아내를 위해 새 이불까지 마련하는 정성을 보였지만, 왕 여인이 돌아온 지 두 달 가량 지난 어느 추운 겨울날 밤 말다툼 끝에 왕 여인을 목 졸라 죽이고, 시체를 집 앞의 숲 속 눈밭에 갖다 버렸다. 날이 밝자 런은 자기 아버지와 함께 관아에 가서 이웃사람 가오(高)를 고소했다. 

가오가 자기 아내를 살해해서 숲 속에 버렸다고 허위진술을 했던 것이다. 당시 탄청 현의 지현(知縣, 현의 수령)이었던 황류훙(黃六鴻)은 4일간의 재판 기간 동안 왕 여인을 살해한 진범이 바로 남편임을 밝혀낸다. 그러나 런은 아내를 죽이고 이웃사람에게 살인죄를 덮어씌운 중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법에서 정한 형벌보다 비교적 가벼운 중책가징(重責枷懲, 무거운 대나무로 볼기를 치고 일정기간 동안 목에 칼을 씌우는 형벌)을 받는다. 런이 외아들이며 연로한 아버지를 부양해야 하고, 가오(高)가 런을 모욕하고 때린 사실이 있다는 정상을 참작했기 때문이다. 또 왕 여인이 외간 남자와 간통을 하고 도망친,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죄인이나 진배없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그런데 그런 왕 여인에 대해서 황류훙은 후한 장사를 치르도록 각별한 배려를 했다.
어떻게 보면 중국 역사에서 이런 사건은 하찮고 별 의미없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왕 여인이 열녀가 아니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미모나 재능이 특출 났던 것도, 집안이 좋았던 것도, 남편이 높은 벼슬을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 여인은 3백년이라는 시간과 동서양의 공간을 넘어서 스펜스라는 역사가에게 중국 역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스펜스는 왕 여인을 통해 지배자의 역사가 아닌 가난하고 잊혀진 사람들의 역사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왕 여인과의 만남을 이렇게 비유했다. 왕 여인은 바닷가의 무수히 많은 조약돌 가운데 하나 같은 존재였지만 그 돌을 집어드는 순간 따뜻한 역사의 온기가 자신의 육체에 전해져 왔다고.

소설 같은 역사
왕 여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 책은 구체적인 사례와 <요재지이>의 이야기들을 씨줄과 날줄로 해서 탄청 현의 자연환경과 자연재해, 주요작물, 농사 일, 인구, 과중한 세금, 탈세, 요역, 과거제도, 빈번한 자살, 법률, 살인, 재판과정, 지방의 행정 군사조직, 개인간 가족간 이웃간의 반목과 분쟁, 결혼, 과부의 고통, 여성의 정절, 이혼, 민간신앙, 귀신 문제, 복수와 같은 사적인 폭력, 도적들과 도망자의 문제, 시장, 감옥 등 청대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사항들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떤 사회와 제도 아래에서 살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만약 스펜스가 단순히 탄청 현의 현실을 설명하는 것에 그쳤다면 이 책은 특별한 역사책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스펜스는 역사의 뼈대를 제시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거기에 살을 붙이고 살아 있는 숨결을 불어넣으려 했다. 그래서 일정한 형식에 맞추어 간행된 공식 기록 외에 역사 자료로는 보기 힘든 당시의 소 설까지 과감하게 이용했는데, 그것이 바로 <요재지이>(聊齋志異)라는 작품이다. 사실 이 소설집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판타지 문학에 가까운 것이어서 더더욱 역사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지만 스펜스는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만이 쓸 수 있는, 눈앞에 두고 보는 듯한 역사를 완성했다. 독자들은 소설 속의 이야기들이 건조하게 서술된 역사적 사실들을 얼마나 생동감 넘치게 만들어주는지를 보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특히 왕 여인이 남편한테 살해될 때의 몽환적인 이미지들(200~206쪽)은 『요재지이』에 실린 총 500편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종횡으로 섭렵하며 절묘하게 인용한 문장으로 구성된 것인데, 단연 이 책의 압권이다. 
역사가 주는 감동
결국 이 책의 전체 내용은 왕 여인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가난하고 나약한 사람들과 절망에 빠진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왕 여인이 살았던 현실을 비판하지 않는다. 역사를 평가하지도 않는다. 비판을 하든 평가를 하든 교훈을 끄집어내든 모든 것은 독자가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할 일이다. 그 어떤 판단도 강요하지 않고, 독자를 흥분시키지도 않으면서 다만 잔잔한 여운과 같은 가슴 찡한 감동을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책의 미덕이다. 

저자 조너선 D. 스펜스(Jonathan D. Spence)

예일 대학 역사학과 석좌교수(Sterling Professor)이며 현재 미국 중국사 학계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이다. 1936년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윈체스터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다. 1959년 예일 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1965년에 역사학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구겐하임 펠로우쉽, 맥아더 펠로우쉽 등을 수상했으며, 미국예술과학원과 미국철학협회 회원이다. 역사와 문학을 결합한 그의 독특한 역사서술방식은 연구자를 비롯한 일반 독자 모두를 사로잡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가 쓴 책으로는 The Death of Woman Wang, <천안문>,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God's Chinese Son 등 10여 권이 있다.

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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