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출판인회의 이달의 책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의 사회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번역'. 근대 일본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왜 번역했는가?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역사적 조건은 무엇이었는가?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가 문답으로 펼치는 흥미진진한 번역의 사상사.
번역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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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서양 열강은 일본 근해까지 출몰하여 직접 교역과 개방을 요구해 왔다. 당시의 일본 막부 정부는 한국이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마무기 사건, 페리 내항 등 충격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서양과 치른 몇 번의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바꿔 버린다. 서양에게 졌다고 자각하자마자, 쇄국의 이데올로기였던 존왕양이론을 버리고 막부를 몰아내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생을 보내고 시찰단을 파견한다. 그러나 유학이나 견학 이상으로 일본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책이었다. 서양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일본어로 번역한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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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가 외국어라는 의식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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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의 번역문화가 서양과의 접촉이라는 외적인 충격에 의해서만 생겨난 것은 아니다. 자국어와 외국어의 차이를 의식하지 못하면 번역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한국과 일본은 한자를 자기의 문자처럼 사용했고, 특히 지식인들은 자국어보다 한자가 더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그런데 마루야마 마사오에 의하면 17세기 말 일본에서 최초로 중국어를 외국어로 의식한 인물이 등장한다. 오규 소라이(1666∼1728)이다. 그는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하니 불역낙호(不亦樂呼)아"라는 식으로 <논어>를 읽어서는 <논어>를 읽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일본식으로 바꿔 읽었을(번역했을) 때만이 그 의미를 제대로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을 통해 번역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번역을 통해 자신의 언어적 정체성을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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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의와 영어 국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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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초기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번역밖에 없다는 번역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수많은 번역서들이 양산되었다. 늘 그렇듯이 이때에도 잘된 번역과 잘못된 번역이 혼재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보수적인 사상가이며 사회진화론으로 유명한 허버트 스펜서의 Social Statics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직역하면 <사회정학>(社會靜學) 정도가 되는데, 엉뚱하게 <사회평권론>으로 번역되어 급진적인 자유민권운동가들의 성전(聖典)이 되었다.
한편 이 무렵 번역주의보다 훨씬 과격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모리 아리노리가 '영어 국어화론'(본문의 50∼52쪽 참조)을 주장한 것이다. 일본어에는 추상어가 없기 때문에 일본어만 가지고서는 도저히 서양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 없으므로 영어를 국어로 하자는 주장이었다. 물론 일본 사회는 이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비록 일본의 이야기지만, 이 대목은 그로부터 한 세기 이상 지난 오늘날 유례없는 영어 열풍이 불고 심지어는 '영어 국어화론'이 공공연히 제기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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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번역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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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메이지 시대는 '번역의 홍수'를 이룬 시대였다. 불과 6∼7년 사이에 수만 권이 번역되어 나왔고, 분야도 다양해서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번역이 이루어졌다. 특히 역사, 지리, 법률, 정치, 화학과 관련된 책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가 밀(J. S. Mill)의 <자유론>(On Liberty)을 번역한 <자유지리>(自由之理)와 막부 말기의 베스트 셀러 <만국공법>(萬國公法)을 들 수 있다. <만국공법>은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과 더불어 근대법의 가장 중요한 고전 가운데 하나인 헨리 휘턴의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1836)를 중국어로 번역한 것을 일본어로 중역한 책이다. 중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만국공법>은 서양의 법률용어를 당시의 일본인이 어떻게 한자어로 번역해 냈는지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베스트셀러(이 책이 정확히 얼마나 팔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의 베스트셀러 중에는 100만 부 이상 팔리는 책도 드물지 않았다)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근대 세계에 대한 일본인들의 발빠른 대응을 엿볼 수 있다. 반면 중국에서는 <만국공법>이 관청에나 비치되어 있는 정도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여지껏 번역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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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자국의 말을 만드는 재창조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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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번역어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아마 이 부분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관심거리일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번역어 대부분이 우리의 독자적인 번역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일본어와 외국어 사이의 1:1 대응관계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본어에서 'society'의 번역어가 '社會'로 정착되기까지는 그 의미를 최대한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복잡한 과정을 거쳤지만, 우리는 'society=사회'라는 하나의 공식 같은 결과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society의 고유한 의미, 곧 '계약관계에 의해 성립된 인간집단'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양의 근대 사회와 한국의 전통 사회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둘 다 똑같은 'society'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서양문화를 독자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philosophy'를 '哲學'으로 'physics'를 '物理學'으로 쓰지만 일본어에서 그런 대응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무수한 고민과 심지어는 오역(誤譯)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 그리고 이런 번역어 대부분이 중국 고전의 한자어에서 유래한 것이고, 거기에 근대적인 의미를 덧붙인 것이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마도 번역어로 사용되는 한자어를 만들어 낸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후쿠자와 유키치일 것이다. 우리 말에서도 흔히 쓰이는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speech=演說, second=贊成, debate=討論, copy right=版權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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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사회ㆍ문화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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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두 저자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는 함축적인 대화 속에서 번역과 근대의 문제를 빠짐없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문답을 주고받는 두 석학의 박식함과 통찰력이 어우러졌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흔히 일본을 일컬어 '번역왕국'이라고 한다. 전 세계에서 출판되는 거의 모든 중요한 저작들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과장된 측면이 없진 않지만, 번역왕국이라는 말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동서고금의 수많은 책들이 이미 번역되었고 지금도 번역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일본에서 번역된 책은 우리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사실 근대 한국의 지식인들은 서양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주로 일본어로 번역된 텍스트를 통해서 얻다 보니 번역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어를 만들어 내는 데 소홀했다.
무조건 외국어만 잘하면 제일인 양 여기는 지금의 세태에서 이 책은 언어에 대해 우리말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그리고 번역은 단순한 어학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언어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 준다.
저자소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1937년 도쿄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으며, 1940년 같은 대학의 조교수, 1950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대표작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에서 에도 시대의 사상가 오규 소라이를 분석해 일본의 근대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파헤쳤다. 1996년 타계할 때까지 일본 정치학계뿐만 아니라 지성계의 흐름을 주도했다. 주요 저서로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 <일본의 사상>, <전중과 전후의 사이>, <후위의 위치에서>,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충성과 반역>과 전집 17권이 있다.
가토 슈이치(加藤周一) 191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1943년 도쿄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재학 중 문학에 심취하여 '마티네 포에티크' 그룹에 참가했다. <잡종 문화>라는 문명비평서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대작 <일본 문학사 서설>로도 유명한 전방위 비평가이자 작가이다. 최근에는 <사라진 판목(版木), 도미나가 나카모토의 기이한 소문>이라는 희곡을 쓰기도 했다. 현재 리쓰메이칸 대학 국제관계학부 객원교수이다. 그밖에 주요 저서로는 <전후세대의 전쟁책임>, <시대를 읽는다: '민족' '인권' 재고>와 <저작집> 24권이 있다.
북리뷰
| 제목 | 게재지 | 글쓴이 | 날짜 |
01 | '창조적 번역'의 힘! 일 근대화 성공비결? | 문화일보 | 최영창 | 2000.08.31 |
02 | 일 메이지 유신을 이끈 힘은? | 중앙일보 | 조우석 | 2000.09.01 |
03 |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은 "번역문화"였다 | 조선일보 | 김석근 |
2000.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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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 번역이 근대일본 만들었다 | 동아일보 | 정진홍 |
2000.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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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 일본은 없었을 거다, 번역이 없었다면 | 한겨레 | 고명섭 |
200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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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 번역이 일 근대화 앞당겨 | 대한매일 | 김종면 |
200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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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 일본 근대화의 도구, 번역 | 경향신문 | 윤상인 |
200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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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 번역으로 근대의 문을 열다 | 한겨레21 | 구본준 |
200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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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 번역은 일본 근대화의 동력 | 뉴스피플 | 소현숙 |
200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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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탐나는책]우리에게 맞는 번역 어찌할 것인가 | 한겨레 | 전응주 |
200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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