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30일 토요일

이산의책09 마라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가라타니 고진 지음 / 김경원 옮김
1999년 5월 19일 발행 / 264쪽 / 값 12,000원

마르크스의 종언을 일축하며 <자본론>과 일본의 근대문학을 차이성, 외부성으로 새롭게 조명한 금세기 최고의 비평서


저자
마르크스-헤겔주의의 종언이라는 합창이 울려 퍼지는 지금에 와서야 우리는 비로소 마르크스를 읽을 수 있는 시대에 들어섰다. 마르크스는 바로 헤겔이 말하는 '역사의 종언' 이후에 등장한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가능성의 중심'을 지배적인 중심을 해체하는 차이성, 외부성에서 발견한 지은이는 앞으로 마르크스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선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가치형태론에서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을 읽고 사상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충격적인 책이다. 
왜 다시 마르크스인가
2000년대를 앞둔 세기 말에 새삼스레 왜 다시 마르크스인가. 마르크스를 그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주의'에 함몰되어 마르크스의 텍스트보다는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던 지난 1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마르크스는 <자본론>이라는 고전의 저자라기보다 이념의 우상이었다. 마르크스주의를 떠받든 사람들은 자본주의는 자체의 모순으로 종말을 고하고 사회주의가 도래하리라 확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끝나지 않았고, 오히려 사회주의가 몰락해 버렸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자본의 속성은 무엇이길래 영속하는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현실사회주의 몰락이나 마르크스주의의 용도폐기와 무관하게 마르크스는 가장 중요한 독해 대상이다. 왜? 마르크스 안에는 여전히 사유의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력 
일본의 대형서점에 가면 가라타니 고진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그는 폭넓은 독자를 보유하고 있고 많은 책을 썼다. 그가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대중소설가도 시오노 나나미 같은 역사이야기꾼도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많은 저작 중에서도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이자 초판이 출판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다. 이 책이 그토록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는 일본적 상황이다. 이 책은 1970년대 일본에서 신좌익운동이 극적으로 붕괴하면서 마르크스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려던 시기에, 식상할 대로 식상한 기존의 마르크스 해석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각으로 일본사회에 지적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때의 충격은 1980년대로 이어져 그 당시 일본의 대학생이라면 이 책을 안 읽은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또 하나는 세계사적 상황이다. 지난 1세기 반 동안 사회주의 바람은 나라마다 시기는 조금씩 다를지라도 역사의 진보를 가져온다고 믿어지면서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던 지난 1989년 동구권과 소련이 몰락하자 마르크스는 우상의 대상에서 끌려 내려왔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이 역사의 경험은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 책은 1990년 이후에 또다시 지식인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가라타니 고진은 벌써 이 책에서 마르크스 이해를 좌우하던 기존의 지배적인 중심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중심'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제서야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까? 그 까닭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과 크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몇 십년 동안의 군사독재체제는 제쳐두더라도 사실 우리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까지 사회변혁 속에서 엄청난 지적 열병을 앓았다. 그러나 우리가 앓았던 열병의 원인은 엄밀히 말해서 마르크스가 아니라 철저하게 도그마화된 마르크스주의였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마르크스 자체를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 나아가 자본주의가 왜 종말을 고하지 않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단정하는 것에 의해서 회의하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많은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모든 고정관념(외형)이나 과거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마르크스의 텍스트(주로 <자본론>) 속에서 마르크스를 읽는다. 그가 기대고 있는 방법은 구조주의적인 언어분석이다. 물론 이런 방법은 가라타니 고진이 창안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 방법을 응용하여 나름대로 치밀한 독해를 통해 <자본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인 가치형태론에서 '이제까지 사유하지 않은 것'을 읽는다. 어떤 작품이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 책의 저자가 의식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체계 자체에서 뭔가 그가 지배하고 있지 않은 체계를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책에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말고도 세 편의 문예비평과 보론 두 편이 실려 있다. 모두 문학비평에 속하는 글로서 직접 마르크스를 다룬 것은 아니다. 하나는 다케다 다이준의 부고를 듣고 쓴 '역사에 대하여'이고, 두 편은 '나쓰메 소세키론 I, II'라는 제목이 붙은 '계급에 대하여', '문학에 대하여'이다. 그러나 이들 비평을 읽다 보면 가라타니 고진의 사유체계가 바로 마르크스 독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 마르크스를 이렇게 읽을 수도 있구나라고. 어쩌면 독자들에게 1부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보다 2부 이하의 글들이 훨씬 재미있게 읽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를 통해 마르크스를 해석하고 그 해석의 바탕 위에서 일본 근대문학을 이야기하고 사상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마르크스의 잔영조차 다른 글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은 그에게 마르크스는 하나의 담론으로서만 존재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년 일본 효고(兵庫) 현에서 태어났다. 도쿄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영문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69년 <나쓰메 소세키론>으로 <군상>(群像)지 신인문학상을, 1978년에 이 책(<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으로 가메이 가쓰이치로(龜井勝一郞) 상을 수상했다. 일본의 사르트르라 불린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가 1960년대와 1970년대 일본 젊은이들의 지적 지도자였다면, 1970년 후반 이후에는 가라타니 고진이 그 뒤를 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호세이(法政) 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긴키(近畿) 대학 문예학부, 미국 컬럼비아 대학 동아시아학과 교수이며, 지금도 문학비평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근대 일본문학의 기원>, <탐구 I, II>, <은유로서의 건축> 등이 있다.

북리뷰

 제목게재지글쓴이날짜
01  텍스트 통한 마르크스 재해석 한겨레신문고명섭1999.05.25
02  자본주의 소통-교환방식 서술문화일보배문성1999.05.27
03  자본론 해석은 끝나지 않았다 한겨레21이상수1999.06.03
04  현기증 나는 '유식'과 구제불능의 '무식'출판저널정운영1999.07.20
05  '가라타니 자본론' 어떻게 봐야 하나문화일보오애리1999.08.12
06  정운영의 '가라타니 고진 서평'을 반박한다출판저널박유하1999.08.20

댓글 1개:

  1. 안녕하세요 김동권이라고 합니다. 이 책 다시 인쇄하시게 되면 아니 표지를 다시 인쇄하시게 되면 디자인을 그냥 해드리고 싶습니다. 연락 주세요. 이책을 읽고 있는 독자로서 애틋한 마음에 ~^^ 010-3225-0106 입니다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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