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30일 토요일

이산의책 35 쾌락의 혼돈

쾌락의 혼돈—중국 명대의 상업과 문화
티모시 브룩 지음/ 이정∙강인황 옮김
2005.1.29/ A5신 400쪽/ 20,000원/ ISBN 89-87608-43-3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던 명대 사회 내부에서 꿈틀대고 있던 인간의 욕망과 시대적 격변에 초점을 맞추어, 왜 명대에 상업이 발달하고 전세계의 은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왔는지를 연대기적 내러티브 구조 안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책. 

● 편집자 서평
명대의 초상
16세기의 유럽인은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이런 고정관념에는 큰 변화가 없다. 그러나 과연 정말로 그랬을까. 혹시 서양인은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세상을 보고 있었던(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당시의 유럽인이 지구를 일주할 수 있는 배를 만들 만한 기술력을 가졌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들의 무역은 시장에 근거한 것도 아니었고 효율적인 가내공업에 의한 생산품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유럽의 무역은 타자를 약탈하고 노예화하고 귀금속이나 모피, 향신료를 다른 지역에서 헐값에 들여와 비싼 값으로 유럽에 되파는 게 전부였다. 유럽인은 중국에서 비단과 도자기를 비롯해서 사고 싶은 물건은 많았지만 중국에 내다 팔 물건은 거의 없었다. 가치 있는 물건이라곤 남아메리카의 광산에서 강탈한 은이 전부였다. 그리고 당시 유럽의 많은 모험가들이 중국으로 가는 최단거리의 항로를 발견하려고 경쟁을 벌였다는 사실은 명대에 세계의 중심은 유럽이 아닌 중국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중심에 대한 초상이다.
명대의 상업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는 닭 우는 소리와 개 짓는 소리가 서로 들리는 이웃마을이라도 왕래하는 일 없이 살아가는 것이 낙원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적 이동의 금지와 사·농·공·상의 차별적 신분질서를 명조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다. 홍무제의 이 이상은 명대에 대한 후대의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그의 이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소농경제의 안정이 홍무제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상업의 발달을 가져온 것이다. 즉 농촌이 안정되면서 생산이 증대하고 잉여농산물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상업이 번창하게 되었다.
그리고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데 필수적인 교통·통신제도의 정비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커뮤니케이션만 신속하고 원활하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물자와 인력의 이동까지 원활하게 하는 부수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국가의 교통통신망이 지방경제와 연계됨에 따라 확대된 시장경제는 기본적인 생산단위인 농촌 가구를 혼란에 빠트리지 않고도 도시노동과 농촌노동을 연속적인 생산과정 속에 조직화했고 생산과 소비를 완전히 분리시키지 않으면서 소비 패턴을 재편했다. 비록 경제변화는 더뎠지만 신사층(紳士層) 내부에 서서히 침투하여 이들의 상업에 대한 경멸을 점차 잠재웠다. 이제 그들도 상업이 가져다주는 쾌락에 익숙해져 갔던 것이다.

문화적 변화
상업의 형성과 발달은 문화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지은이는 이 책이 명대의 경제사가 아니라 문화사라고 말할 정도로 명대의 문화를 풍부하고 세밀하게 이야기해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출판이다. 명대에는 상업의 발달과 함께 상업적인 출판이 붐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지식인과 애서가들의 꿈은 만 권(萬卷)의 책을 소장하는 것이었다. 명대 이전에는 사실 '만 권'이라는 말은 '만세'(萬歲)라는 말처럼 상징적인 표현에 불과했지만, 명대에 출판이 발달하면서 만 권을 소장한 사람들이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명대 후기에는 권수로 만 권이 아니라 종수(種數)로 만 권을 소유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경제가 가장 발달했던 중국의 장난(江南) 지방에는 만권루(萬卷樓)라는 이름이 붙은 개인의 장서각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출판 관련 업종도 전문화되어 종이생산으로 유명한 마을이 생겨나는가 하면 오늘날의 출판단지처럼 출판사가 밀집해 있는 곳도 있었다. 서점은 단순히 책만 팔았던 것이 아니라 독자와 출판사의 가교 역할을 하고 팔릴 만한 책이 있으면 출판을 지원하기도 했다. 개인문집과 총서류 같은 일종의 학술출판도 활발했다. 중국역사상 최초의 신문도 발간되었다. 이 신문은 베이징 정계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소식지였다.
한편 장사로 돈을 번 부유한 상인들은 그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예술품을 사들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진품을 구별할 수 있는 감식안이 없었다. 신사층은 돈만 많고 취향은 천박하기 그지없는 그런 졸부들을 경멸했다. 따라서 자신을 남과 구별짓고 문화적 우월성을 은연중에 과시하기 위해서는 예술품과 골동품을 고르는 안목과 그것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방법, 그리고 역사상 유명한 화가와 공예가들의 이름 및 그들의 작품을 외우고 있어야 했다. 명대에는 이런 지식을 정리한 책(<격고요론 格古要論>)이 적지 않게 팔려 나갔다.
고상한 취향을 따라하는 것 외에 도시에서는 유행이 생겨났다. 유행은 직물생산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비단과 면포는 경제발전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도자기와 함께 전 세계로 팔려 나가는 중국의 대표적인 상품이었다. 상업은 상품의 생산과 이동만 자극했던 것이 아니다. 상업과 교통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이동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그러다 보면 상업적인 목적이나 공무상의 출장 이외의 여행도 많아지게 된다.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명승고적을 찾아 다니는 여행광들이 나타났고, 교통의 발달은 점점 더 먼 곳으로의 여행을 가능케 했다. 그리하여 명대 후기에는 개인적으로 중국 전역을 여행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물론 이런 여행은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여성의 발을 영원히 묶어둘 수는 없었다. 절이나 도관(道觀)으로 동네 아낙네들과 떼지어 참배여행을 가겠다는 아내를 못 가게 막을 수 있는 남편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상업은 성(性)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국의 시장과 도시에서는 예외없이 매춘업이 호황을 누렸고, 풍류를 자랑하는 신사층과 시서화에 능한 예기(藝妓) 사이의 낭만적이고 때로는 비극적인 사랑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또한 일부 신사층 사이에서는 동성애가 성행하여 미동(美童)이 나오는 매춘굴이 생겼다. 드물게 이곳에서는 명조 사회의 성적 질서를 역전시키는 일도 벌어졌다. 은밀하게 남장여인이 찾아와 남자의 성을 구매해서 밤새도록 놀다 갔던 것이다.
명조의 몰락
이런 문화적 변화 앞에서 명대 후기의 일부 신사층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말세라고 개탄하며 상업이 사·농·공·상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돈과 쾌락이 난무하는 사회를 만든 악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의 우려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신사층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상인행세를 하며 명청교체기라는 격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결국 상업을 악으로 비난한 사람들은 틀린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회복되기를 바랐던 가부장주의적이고 위계적인 지배계급의 가치가 계절이 다시 찾아오듯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들은 명조가 멸망한 뒤에도 상당히 오랜 기간 중국의 사회구조를 지탱해갔다.

저자 티모시 브룩(Timothy Brook)

1951년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1973년 캐나다 토론토 대학을 졸업하고, 1974~1976년에 교환학생으로 중국 상하이의 푸단(復旦) 대학에 유학했다. 이후 하버드 대학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석사학위(1977)와 박사학위(1984)를 받았다. 앨버타 대학 연구교수, 스탠퍼드 대학 교수, 토론토 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UBC)의 아시아연구소 중국학과장 겸 같은 대학 산하 세인트존스 칼리지(대학원 과정) 학장이다. 이 책 <쾌락의 혼돈>으로 2000년 하버드 대학에서 수여하는 레벤슨 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Buddhism and the Formation of Gentry Society in Late-Ming China (1993), Collaboration: Japanese Agents and Local Elite in Wartime China (2004) 등이 있다.

북리뷰

 제목게재지글쓴이날짜
01  대서양의 조수를 빨아들인 명대 중국연합뉴스김태식2005.02.04
02  명나라의 富, 그 빛과 그림자동아일보권재현2005.02.05
03  '자본주의' 창궐했던 명나라경향신문한윤정2005.02.05
04  '세계의 중심' 명나라의 상업발전조선일보김기철2005.02.05
05  中 명대에도 매춘, 자본주의와 유사문화일보최영창2005.02.11
06  상업 전성시대 '명나라의 사계'한겨레박천홍2005.02.12
07 '사계'로 풀어낸 명나라의 부침부산일보김아영2005.02.14
08 치밀하고 인상깊은 16세기 명대 사회 스케치북앤이슈표정훈2005.11호

이산의책34 창힐의 향연

창힐의 향연—한자의 신화와 유토피아
다케다 마사야 지음/ 서은숙 옮김
2004.12.24/ A5신 304쪽/ 13,500원/
 ISBN 89-87608-42-5

'네 개의 눈'을 가진 신화적 존재 창힐이 만들었다는 한자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중국인들이 겪었던 고충과, 그 고충을 희열로 나아가 문자의 향연으로 바꾸려 애썼던 '인간 창힐'들에 대한 이야기. 기발한 발상과 분방한 상상력으로 한자와 중국어의 역사적 여정을 돌아보는 기회를 주는 책. 

● 편집자 서평
한자의 기원과 창힐
한자는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유일한 고대문자이다. 실존하는 자료로서 가장 오래된 한자는 1903년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중국 은나라 때의 갑골문자로, 이것은 기원전 14~12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자의 정확한 기원 및 역사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창힐은 이렇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한자의 기원과 관련해서 중국의 여러 고적(<한비자> <여씨춘추> <회남자> <설문해자> 등)에서 "조수(鳥獸)의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만들었다"고 종종 이야기되는 한자창제설의 주인공이다. 물론 창힐은 그 사실성(史實性)이 의심되는 신화적 존재이기는 하나, 여러 기록과 도상에서 묘사되는 그 특별한 외모가장 큰 특징은 '네 개의 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 책 <창힐의 향연>은 중국인이 자신들의 '네눈박이' 선조가 창조한 이 특별한 문자를 익히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통과 쾌락의 기록이다. 다시 말해 '눈이 두 개 부족한' 범인(凡人)들이 한자라는 발명품을 능란하게 다루지 못하고 얼마나 버거워했는지, 그래서 한편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자를 회의 또는 혐오하고 그것과 싸워왔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자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하는 의문에 대해 가히 감탄을 자아낼 만큼 방대한 지식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한자와 중국어의 역사를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고, 사각형 안에 갇힌 문자와 인간 사이에 펼쳐진 애증의 관계를 보여준다.
표의성의 신화와 '달나라 언어'
한자는 가장 전형적인 표어문자(表語文字)이며, 표어문자는 각각의 문자마다 각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바로 이런 한자의 표의성이야말로 전혀 다른 메커니즘의 문자를 사용하는 서양인에게 감탄의 대상이 되었다. 16세기경부터 주로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유럽에 소개된 이 동양 제국의 문자를, 예컨대 1585년 로마에서 간행된 <중국대왕국지>(中國大王國誌)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이 나라에서는 상이한 다수의 언어가 사용되는데, 구두로는 서로 이해할 수 없지만 필기로 하면 널리 일반적으로 통한다는 사실은 정말로 경이롭다 할 만하다. 그 이유는 하나의 기호 혹은 문자가 사람에 따라 상이한 음으로 발음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이 표시하는 사물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중략) 이렇게 함으로써 일본인과 류큐인, 수마트라인과 코친차이나인 그리고 기타 인접지역의 사람들은 중국인과 의사를 소통할 수 있다."
이러한 경탄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서양인들은 한자를 바벨탑의 붕괴 이후 그들이 잃어버린 '아담의 언어'에 필적할 만한 '보편의 언어' '진정한 문자' '철학적 언어'의 후보로까지 거론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어 특유의 성조(聲調)와, 17~18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SF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달나라 여행담에 묘사된 달나라 언어의 '음악적' 특징 사이의 유사성은 서양인의 눈에 중국이 문자/언어의 유토피아요, 한자/중국어는 유토피아의 문자/언어로 비쳐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마저 가능케 한다.
두눈박이 창힐들의 등장
이와는 반대로 한자에 회의를 품고 있던 중국의 언어학자들은 17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들어온 라틴 알파벳의 표음성에 넋을 잃었다. 읽는 사람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한자의 발음은 중국인들에게 오랫동안 골칫거리였기 때문이다.(방대한 영토에서 사용되는, 거의 외국어나 다름없는 각지의 방언은 이런 문제를 더욱 가중시켰다.) 훨씬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1900년 중국에서 <80일간의 세계일주>가 번역출간되었을 때 지은이 쥘 베른의 이름 표기가 '자오스웨이얼누'(焦士威爾奴) '팡주리스'(房朱力士) '샤오얼쓰보네이'(蕭爾斯勃內) '자얼웨이니'(迦爾威尼) '샤오루스'(蕭魯士) '페이룬'(培侖) '판나'(范納) '웨이난'(威男) 등으로 가지각색이었다는 사실은 중국인이 한자라는 문자체계에 대해 가졌을 고민의 일단을 짐작케 한다.
이런 언어/문자 상의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예로부터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해온 중국인들은 이제 서양의 표음문자에 매력을 느끼고 그 효용성을 역설하게 된다. 명말 청초의 팡이즈(方以智)는 <통아>(通雅)에서 "각각의 사물에 하나의 문자가 있고 문자가 각기 하나의 뜻을 지니는" 한자의 번거로움을 지적하고, "유럽처럼 사물마다 음을 합성하고 음에 따라 문자를 구성하면 음이 중복되는 일 없이 가장 뛰어난 문자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제언한다. 이런 문제의식은 급기야 여러 '두눈박이' 창힐들을 출현시킨다. 그들이 창안한 표음식 신문자는 로마자와 그 변형을 사용한 것, 한자와 그 변형을 사용한 것, 속기기호를 사용한 것, 숫자를 사용한 것, 아예 새롭게 창조한 것 등 다종다양했다. 에스페란토를 강력히 추천했던 베이징 대학 학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1912년 세계어학회 환영회 연설에서 한 말에 따르면, 그때까지 표음문자를 고안한 중국인이 100명 정도라고 한다. 또 이들처럼 구체적인 문자 매뉴얼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탄쓰퉁(譚嗣同)이나 캉유웨이(康有爲)처럼 언어/문자의 개량을 역설하며 미래의 이상적인 중국사회에 대해 구상한 언어 유토피안도 있었다.
현대의 한자, 계속되는 문자의 향연
중국역사상 무수한 창힐들이 등장했으나, 그 누구도 원조 창힐과 같은 신화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보다 조직화되고 정책화된 문자개혁이 시도되었다. 그 일환으로 1949년에 중국문자개혁협회가 수립된다. 그리고 "문자는 개혁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문자의 표음화라는 세계 공통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한자의 표음화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므로 표음화에 앞서 한자를 간략화해 현재의 사용에 도움이 되도록 함과 동시에 다양한 준비를 진행시켜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교시에 따라 표음방식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해서 발표된 것이 오늘날의 '한어병음방안'이다.(이 시기, 그러니까 중국문자개혁협회의 수립 이후 1958년 '한어병음방안'이 공포되기 전까지 수많은 현대판 창힐들이 고안한 무려 1천여 종의 표음문자 방안이 협회로 밀려들었다고 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간략화한 한자 즉 '간체자'와 그 표음체계인 '한어병음방안'이 함께 운용되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창힐들은 여전히 새로운 문자 연구를 멈추지 않고 있다. '한어병음방안' 공포 이후 1980년까지 중국 안팎에서 1,667종의 중국어 표음문자방안이 고안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1980년대 이후 종래의 '한자낙후론'에 반대하며 한자 자체의 우수성을 부르짖는 복고적 움직임도 일고 있다. 한자에 대한 회의 또는 혐오에서 출발한 여정이 결국 한자로 되돌아온 셈이다. 이후 한자가 또 어떤 여정을 걷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한자는 완료형의 문자가 아니라 새로운 전망이 필요한 현재진행형의 문자라는 점, '두눈박이' 창힐은 앞으로도 계속 등장하리라는 점이다. 더욱이 중국이 21세기를 "한자/중국어가 위력을 발휘할 시대"로 상정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지금,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는 중국의 이웃나라들은 계속되는 문자의 향연에 어떤 초대장을 받게 될지 예의주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저자 다케다 마사야(武田雅哉)

1958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하코다테(函館) 시에서 태어났다.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박사과정을 중퇴했다. 현재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 교수이며, 중국문화사·중국문학·중국미술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1994년 산토리 학예상 사회·풍속 부문을 수상한 이 책 <창힐의 향연한자의 신화와 유토피아> 외에 <비상하라! 대청제국>(1989), <저팔계의 대모험>(1993), <별을 향해 떠나는 뗏목>(1997), <중국과학 환상문학관>(공저, 2001) 등이 있다.

북리뷰

 제목게재지글쓴이날짜
01 남의 '문자'가 커 보인다?한겨레구본준2005.01.15
02 한자는 누가 왜 만들었을까동아일보유윤종2005.01.15
03 '창힐의 향연'에 죽어간 이들의 묘비명연합뉴스김태식2005.01.15
04 한자, 과연 '축복의 언어'인가부산일보이상헌2005.01.17
05 한자와 중국문화 깊이 알기시사저널표정훈2005.01.24

이산의책32∙33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 2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
모리스 마이스너 지음/ 김수영 옮김
2004.12.30/ A5신 416쪽/ 19,000원/ ISBN 89-87608-41-7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모리스 마이스너 지음/ 김수영 옮김
2004.12.30/ A5신 416쪽/ 19,000원/ ISBN 89-87608-40-9

우리 시대 최고의 중국사 연구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저자가 영욕으로 얼룩진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를 심도 있게 고찰함으로써 사회주의 중국과 자본주의 중국의 모순과 잠재력을 재평가하고 나아가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한 책. 

● 편집자 서평
혁명의 유산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참패한 중국은 과거 제국의 영광을 뒤로 한 채 동네북으로 전락했다. 제국주의 열강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중국의 현실을 앞에 두고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은 점점 중국의 전통과 중국적 가치를 거부하며 새로운 가치와 모델을 찾았다. 그들에게는 서양의 '민주주의'와 '과학'이 중국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방안으로 보였다. 그러나 베르사유 강화회의의 결정이 중국에 내셔널리즘적인 분노를 야기하면서 근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이 무렵 일부 지식인들은 러시아 혁명이 제시하는 반(反)제국주의 세계혁명에서 새로운 비전을 발견했다. 중국의 지식인에게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중국의 낡은 전통과 제국주의의 지배를 모두 거부할 수 있는 길이었다. 원래 마르크스주의에서 내셔널리즘의 운명은 사회혁명의 목적에 그 자리를 내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중국의 지식인들은 애당초 내셔널리즘적인 열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기 때문에,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내셔널리즘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내셔널리즘의 터널을 지나면서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회주의적 비전에 도달한다. 그것은 사회혁명과 국가의 독립 그리고 부강(富强)이었다.
마오쩌둥과 마오주의
중국혁명은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고 강철 같은 단결을 유지한 혁명가들과 대중의 공동작품이지만 그 주역은 단연 마오쩌둥이다. 마오쩌둥이 중국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간적인 장점, 즉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 명민한 두뇌, 탁월한 리더십, 타인을 사로잡는 카리스마 등에 힘입은 바 크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훗날 마오주의(Maoism)라고 불리게 된 그의 사상이었다. 따라서 중국혁명사 나아가 중국현대사를 꿰뚫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마오주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테면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1949년 이후의 역사만 보더라도 중국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나라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수십 년 동안 절대평등을 추구하다가 어떻게 그토록 순식간에 부자가 되기 위해 혈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라고물론 '사회주의' 앞에 '시장'이라는 말을 붙이긴 했지만주장하는 중국공산당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런 의문들을 풀어주는 실마리를 우리는 마오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마오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혁명에 있어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나라에서만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부정하고 인간의 의지와 사고(思考)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마오주의의 이 주의주의(主意主義)적 관점은 마오쩌둥이 혁명의 고비 때마다 그리고 정치적 위기 때마다 대중을 선동하고 대중의 역량을 결집시키는 대규모 대중운동을 전개하여 상황을 반전시키는 강력한 무기가 되곤 했다. 혁명 초기에 노동운동 중심의 계급혁명이 참혹한 실패로 끝나자 마오쩌둥이 혁명의 주력을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농민으로 설정하여 결과적으로 혁명에 성공한 것은 중국의 경제적 후진성과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 즉 대중의 혁명의지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마오주의의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는 내셔널리즘의 경향이다. 젊은시절 마오쩌둥이 54운동에 참여한 것은 베르사유 강화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애국적인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훗날 코민테른에 반기를 든 것이나 공산당 계열이 아닌 중도적인 여러 민주 정파들과 지식인을 인민공화국에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이나 소련과 대립하게 되는 것, 이 모두가 기본적으로 마오주의가 내셔널리즘에 경도되어 있었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상과 같은 두 가지 특징에 더하여 마오주의는 절대평등의 유토피아를 추구하고 있다. 이것은 주로 마오쩌둥 말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유토피아에 대한 추구가 마오쩌둥 개인의 몰락뿐만 아니라 중국의 사회주의 실험을 파국으로 몰고가는 요인이 된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평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당대(當代)에서 아직 논란이 분분한 인물에 대해서는. 그 중에서도 마오쩌둥은 아마도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이 책에서 모리스 마이스너가 내리는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가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답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빼어난 통찰력을 보여준다.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마오쩌둥에 대한 온갖 덧칠무조건적인 비판이나 찬양을 벗겨내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마오쩌둥의 의도를 균형 있게 감안한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에 '부강'과 '평등'을 동시에 가져오고 싶어 했다. 그래서 부단히 근대화를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격차를 없애려고 했으며, 고급 의료 서비스보다는 예방의학을 엘리트 교육보다는 평등교육을 추구했다. 마오쩌둥의 최대 실정(失政)으로 꼽히는 농촌의 급진적인 인민공사화, 무모한 대약진운동, 광란의 문화대혁명도 실은 사회적 차별을 최소화하고 공산당의 관료주의화를 억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마이스너는 이처럼 마오쩌둥의 선의(善意)를 관대하게 인정하면서도 평가만큼은 냉정하기 그지없다. 무릇 정치가는 의도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 평가받는 것이라고. 따라서 마이스너가 보기에 마오쩌둥의 최대 업적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중국이 근대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그 증거로서 저자는 마오쩌둥 시대 중국경제는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파괴 속에서도 성장을 계속해 나갔다는 통계자료를 제시하고,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마오쩌둥이 이룩한 근대화의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덩샤오핑과 시장개혁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처럼 중국을 근대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국가로 만들겠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 있었지만 마오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굳이 분류한다면 마오쩌둥에게 숙청당한 류사오치(劉少奇)처럼 레닌주의자에 가까웠다. 실제로 마오쩌둥이 생전에 덩샤오핑은 "나에게 상의 한 번 한 적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더구나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의 피해자였고, 문화대혁명의 수많은 피해자들(주로 당 간부, 정부 관료, 도시의 지식인과 청년)의 지지를 등에 업고 권좌에 오른 만큼 마오주의를 비판하고 마오쩌둥과 자신을 차별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마오쩌둥을 부정한다는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덩샤오핑의 선택은 마오쩌둥의 공과를 구분해서 '공'은 계승하고 '과'는 털어버리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천안문 앞에 걸어 놓은 것은 단순히 그냥 걸어 놓은 게 아니라 우리를 승리로 이끌고 우리나라를 건설한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라는 덩샤오핑의 말은 그의 의중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즉 마오쩌둥을 혁명전통과 내셔널리즘과 근대화의 상징으로만 보존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정치적 잘못과 급진적인 유토피아 사상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마오쩌둥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덩샤오핑이 치켜든 기치는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이었다. 정치개혁은 바로 민주주의를 뜻하며, 경제개혁은 계획경제의 수정, 즉 시장개혁을 의미했다. 마오주의 시대의 방식과 경제성장 속도로는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덩샤오핑은 과감하게 대외개방정책을 실시하여 외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여 전지구적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그것은 곧 과거의 평등과 분배방식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철밥통을 깨부수라"는 구호와 이제부터 "누군가 먼저 부자가 될 것이다"라는 그의 말에는 그가 추진하는 시장개혁의 본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어쨌든 덩샤오핑의 경제개혁은 외형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정치개혁은 사정이 달랐다. 덩샤오핑과 그의 동지들은 공산당의 무오류성을 신봉하는 레닌주의적 신념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당 독재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당의 통제를 받지 않는 어떤 독립적인 사회단체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덩샤오핑의 정치개혁 약속은 말잔치에 불과했다. 덩샤오핑의 정치개혁에 대한 실망과 경제개혁의 부작용에서 비롯된 민주화의 열기는 1989년 6월 천안문 광장에서 극적으로 표출된다.
중국은 어디로
참혹한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린 1989년의 천안문 사건은 덩샤오핑 정권 하의 중국사회의 현주소를 잘 말해주고 있다. 덩샤오핑의 경제개혁은 전반적인 소득증가에 따른 소비의 증가를 낳음으로써 중국경제에 전례 없는 경제적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 과정에서 덩샤오핑의 말대로 일부가 먼저 부자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부의 부자들 가운데 대부분이 공산당 간부나 그들의 자녀 친척 친구들이었다는 점이다. 즉 건전한 부르주아지에 의해 부가 창출된 것이 아니라 관료의 권력을 이용한 부정축재가 초기 자본축적의 중심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인민들 사이에서는 당 간부와 관료들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져갔다. 더구나 현실에서 직면하게 되는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실업의 공포는 그들의 생활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과거의 사회복지혜택은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으며 빈부격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벌어지고 있었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근절되었던 온갖 사회범죄도 되살아났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불만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이 위기를 군대를 동원하여 정면돌파하고 경제개혁에 더한층 박차를 가했다. 실종된 정치개혁의 빈자리는 대대적인 애국주의 열풍으로 대체되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전 중화권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중국 내셔널리즘은 민주화에 대한 욕구를 완전히 잠재워버렸다. 지금도 중국공산당은 인민들에게 경제적 자유만 허용하고 정치적 자유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런 현실에 대해서 중국인들은 별 불만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중국의 사회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으며 특히 도시와 농촌의 노동인구는 중국의 국내시장과 공산주의 국가 그리고 세계경제라는 삼면의 공격 앞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고 진단한다.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아직은 산발적으로밖에 표출되지 않는 이들의 불만이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중국공산당을 언젠가는 벼랑 끝으로 내모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할지도 모른다.

저자 모리스 마이스너(Maurice Meisner)

중국 현대지성사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손꼽히는 모리스 마이스너는 1931년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시카고 대학을 졸업하고, 1962년 같은 대학 대학원 역사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 박사후 연구원(1962∼1964)을 거쳐 버지니아 대학 역사학과 조교수(1964∼1968)로 첫 교편을 잡았다. 1968년 위스콘신 대학 역사학과로 자리를 옮겨 1998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30년간 재직했다. 1999년에는 런던정경대학 초빙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위스콘신 대학 명예교수이자 하비 골드버그 프로페서이며, 저술가로서 집필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이 책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를 비롯해서 Li Ta-chao and the Origins of Chinese Marxism (1967),Marxism, Maoism and Utopianism (1982), The Deng Xiaoping Era (1996) 등이 있다.


북리뷰


 제목게재지글쓴이날짜
01 "마오는 중국에 근대적 산업화 이룩한 지도자였다"연합뉴스서한기2005.01.05
02 격동의 중국현대사 그 내면을 파헤치다한겨레구본준2005.01.08
03 "마오 시대, 문혁 실패했지만 산업화 성공"조선일보김기철2005.01.08
04 자본주의 벗삼은 中 사회주의 실험부산일보이상헌2005.01.10
05  "마오가 있었기에 中 산업화 가능했다"한국일보김범수2005.01.15
06 혁명은 무엇을 불러왔나시사저널강철주2005.01.17
07 결과보다 의도를 중시하며 바라본 중국현대사신동아임상범2005.03.01

이산의책31

반역의 책
조너선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2004.7.16/ A5신 376쪽/ 16,000원/ ISBN 89-87608-38-7

대청제국의 지존 옹정제와 옹정제에 반기를 든 대역죄인이 공동 집필한 희대의 기서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 <대의각미록>에 담긴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소수민족 출신의 군주로서 옹정제가 겪어야 했던 정치적 고뇌와 자신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열망이 빚어낸 역사의 아이러니를 읽는다. 

● 편집자 서평
쩡징은 웨중치 장군이 감히 옹정제의 면전에서 "폐하! 등용해서 쓰는 사람을 의심하지 마시고, 의심스러운 자는 아예 등용하지 마십시오"라고 대담하게 직언했다는 소문을 듣는 순간 반역을 꿈꾸었다.
<강희제>의 저자 조너선 스펜스의 최신작
역사와 문학을 절묘하게 넘나드는 새로운 역사서술방법으로 우리를 매료시켜온, <강희제> <천안문> <현대 중국을 찾아서>의 저자 조너선 스펜스의 최신작 <반역의 책>. 이 책에서 스펜스는 다시 한번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반추하는 흥미진진한 과거로의 여행임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준다.
이 여행의 주요 무대는 18세기 중국의 후난 성과 베이징. 주인공들은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자신의 뜻대로 신하들을 능수능란하게 통제하는 옹정제, 황제를 탄핵하기 위해 무모한 반역을 꾸민 고지식하고 나약한 지식인 쩡징, 우직하지만 속임수에 넘어가 대사를 그르친 어리석은 장시, 옹정제의 눈치를 살피며 보신(保身)에 급급하지만 끝내는 신임을 잃고 몰락하는 총독 웨중치, 옹정제의 의중을 옹정제 자신보다 더 잘 읽어내는 심복 오르타이, 쩡징을 극형에 처하라며 누차 상주문을 올리는 등 충성심을 과시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기회주의적인 관료들, 억울한 희생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뤼류량의 후손들, 희대의 사기꾼 왕수, 계란으로 바위 치듯 무소불위의 권력에 저항하며 만용을 부리는 막빈(幕賓) 탕순가오. 이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의 대로를 따라 거닐다 보면 딱딱한 역사전문서가 아니라 한여름밤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질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후난 성 융싱 현의 산골마을에서 시작된다.
황제를 탄핵하려는 역모사건
저명한 사상가 뤼류량의 저작을 우연히 보게 된 융싱 현의 하급 지식인 쩡징은 그의 반청사상에 공감하고 백성이 겪는 고통에 분개하여 촨산총독(川陝總督) 웨중치에게 모반을 권하는 편지를 제자 장시를 통해 보낸다. 웨중치는 비록 지금은 만주족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지만 남송의 민족적 영웅 웨페이(岳飛) 장군의 피를 물려받은 이상 언젠가는 복수를 단행하여 중국의 옛 영광을 부활시킬 것으로 한인들은 기대했다. 그러나 웨중치는 쩡징의 편지를 가져온 장시를 투옥해 심문하고 이 사건을 황제에게 보고한다. 제위 찬탈자, 형제들을 죽인 살인마, 황음을 일삼는 색광, 술고래 따위의 노골적인 비난과 이적(夷狄)은 중화를 다스릴 수 없다는 화이론으로 가득 찬 편지내용을 보고받은 옹정제는, 이는 쩡징뿐 아니라 한인들 대다수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역모 관련자를 색출하여 가차 없이 처벌했지만 주모자인 쩡징에 대해서는 사면하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관용'을 베풀었다. 나아가 옹정제는 이 사건을 철저히 파헤쳐서 자기와 관련된 모든 소문을 일거에 잠재우고 아울러 중국의 사상전통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잘못된 화이관을 바로잡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옹정제는 <대의각미록>을 간행하여 쩡징과 비슷한 생각을 품은 다수의 한인을 설복하고 교화하려 했다.
반역자와 황제의 공저 <대의각미록>
이 역모사건에서 최대 미스터리는 옹정제가 역모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하면서도 정작 주모자인 쩡징에 대해서는 신하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관용을 베풀어 사면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신의 기득권을 잃게 된 한족은 언제나 화이론(華夷論)을 들먹이며 만주족의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에 옹정제는 아예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한족의 화이론을 변형시키고자 신묘막측술을 펼친다. 술(術)이란 자유자재로 바람과 구름과 비를 일으키고 그 속에 몸을 숨기는 용처럼 군주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하들을 은밀히 제어하는 것이다. 옹정제는 밀정이나 주접을 통해 입수한 정보를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신묘막측술을 극대화하고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켜 나갔다. 역모자는 자기의 타도대상이었던 그 황제의 집요한 설득과 훈육에 감복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충성을 맹세했을 뿐 아니라 옹정제는 쩡징을 역모자에서 충성스런 백성으로 변화시킨 과정을 책으로 엮어낸다. 이 책이 바로 <대의각미록>이다. <대의각미록>은 주로 옹정제와 쩡징이 주고받은 서면질의응답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옹정제와 쩡징의 공저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옹정제는 청조의 관료들과 행정조직을 총동원하여 이 책을 전국에 배포하고 그를 괴롭혀온 온갖 유언비어와 반청사상을 불식시키려 했다. 그래서 단순히 배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각급 학교의 필독서로 지정하여 정기적으로 강독하게 하고 중앙에서 관료들을 파견하여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순회 강연회를 개최하기까지 했다.
소문과 진실
그러나 황제의 절대 권력, 청조의 관료조직과 방대한 정보망을 총동원한 대대적인 수사와 사상통제에도 불구하고 옹정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오히려 쩡징이나 왕수를 흉내내는 모방범죄가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쩡징과 뤼류량에 대한 옹정제의 판결에 대해 대놓고 반발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올 정도로 사회적 동요가 심각해졌다. 그런 와중에 옹정제는 쉰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두 달 전 갑자기 치명적인 병에 걸려 발병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옹정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옹정제의 넷째 아들 건륭제는 아버지를 괴롭힌 이 불미스럽고 의혹으로 가득 찬 사건을 하루속히 깨끗이 마무리짓고 싶었다. 즉위한 이듬해인 1736년에 그는 신하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 사건을 재심하여 옹정제가 용서해준 쩡징과 장시를 도로 잡아들여 대역죄로 다스린다. 그리고 옹정제가 간행하고 배포한 수십만 권에 달하는 <대의각미록>을 금서로 지정하고 모조리 회수하여 파기하는 조치를 내린다. 이로써 무수한 목숨을 앗아가며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던 쩡징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옹정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소문을 지워버리고 자기가 말하는 진실만을 남겨두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 건륭제는 소문만 없애는 것은 불가능함을 깨닫고 옹정제와 관련된 소문과 진실을 모조리 역사에서 없애버리려고 했다. 그래야만 소문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랴. 사람들은 소문과 진실을 모두 망각한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소문만 기억했다. 그리고 소문이 진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대의각미록>에 나오는 소문과 궁중암투가 모두 진실이기 때문에 옹정제의 아들 건륭제가 이 책을 금서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역사는 그런 것
<반역의 책>은 단순히 특이한 한 사건에 대한 분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옹정제가 다스리던 18세기 초반 중국 사회의 전체상을 그리고 있다. 이야기의 주무대인 후난 성 일대의 지리, 행상들의 이동로, 농촌마을의 풍경, 지식인들의 교류 관행, 주접제도의 운용방식, 길조나 흉조를 조작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전통, 공식문건의 인쇄와 배포과정 등은 물론이고 청대의 중국이 어떤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있었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어떤 정서와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연속적이고 완결된 내러티브 안에서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중국사, 더 나아가서는 역사의 본질을 보게 된다. 역사는 인간의 의지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 사람이 절대권력자라 하더라도.

저자 조너선 스펜스(Jonathan Spence)

미국 예일 대학 역사학과 교수이며 현재 미국 중국사 학계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이다. 1936년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윈체스터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다. 1959년 예일 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1965년에 역사학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구겐하임 펠로십, 맥아더 펠로십, 라이오넬 겔버상 등을 수상했으며, 미국예술과학원과 미국철학협회 회원이다. 역사와 문학을 접목한 그의 독특한 역사서술방식은 연구와 일반 독자 모두를 사로잡는 마력을 갖고 있다.
저서로는 <현대 중국을 찾아서 1∙2> <천안문>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칸의 제국> <강희제> <왕 여인의 죽음> 등 10여 권이 있다.

북리뷰

 제목게재지글쓴이날짜
01 청나라 옹정제의 사상통제 다룬 <반역의 책>연합신문이봉석2004.7.23
02 淸 전성기 '역모통제 노하우'문화일보최영창2004.7.23
03 "반역자를 용서하라"동아일보유윤종2004.7.24
04 '냉혈한' 옹정제는 왜 반역자를 살려줬을까한겨레구본준2004.7.24
05 요동치는 민심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중앙일보조우석2004.7.24
06 '옹정제'는 실패한 독재자였나 비범한 통치자였나경향신문김용석2004.7.24
07 황제, 반역자와 함께 책을 쓰다조선일보김태훈2004.7.24
08 독재군주라도 민중은 두려운 존재부산일보이상헌2004.7.27

이산의책30 장안의 봄

장안의 봄
이시다 미키노스케 지음/ 이동철박은희 옮김
2004.6.18/ A5신 432쪽/ 22,000원/ ISBN 89-87608-37-9

일본 동양사학의 태두 이시다 미키노스케가 유려한 필치와 여러 분야에 걸친 놀랍도록 해박한 지식으로 엮어낸 당나라 수도 장안의 풍속과 역사 이야기. 초판 발간 이후 6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판을 거듭해온 명실상부한 실크로드학의 고전. 

"사전이고 참고서이며 그리고 그 이상으로 장안에 대한 글을 쓸 때 곁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호신부와 같은 책"이노우에 야스시
"역사논문일 뿐만 아니라 낭랑하게 높은 목소리로 낭독하기에 충분한 문학작품"에노키 가즈오
 
당대 문화 관련 작은 백과사전
진(秦)·한(漢)·수(隋) 왕조에 이어 중국역사상 네 번째 통일제국으로서 등장한 당(唐)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유례없는 안정과 번영을 이룩한 명실공히 중국 고대사의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불꽃과도 같은 제국이었다. 특히 문화적으로 당은 문학·미술·음악·종교 등 각 분야에서 다채롭고 수준 높은 성과를 이룩했는데, 한족과 호족, 귀족과 서민, 중화와 외래의 것이 혼효하여 만들어낸 이 시기의 문화는 한마디로 고대 중국문화의 절정이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수도 장안(長安)이 있었다.(서주[西周] 이후 당나라까지 모두 11개 왕조의 도읍이었던 장안은 당대 이후 두 번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당나라에 있어 장안의 존재는 가장 아름다운 계절 봄에 가장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화왕'(花王) 모란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동양사학의 태두로 불리는 저자 이시다 미키노스케는 대도(大都) 장안의 화사하고 번화한 봄풍경 속에 이 화려했던 고대제국의 역사와 문학과 풍속과 사람들을 녹여낸다. 그리고 그의 놀랍도록 해박한―역사는 물론 문학, 철학, 종교, 설화, 언어, 민속, 미술 등 여러 분야에 걸친―지식에 힘입어 이 책은 당대 문화에 대한 작은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게 되었다. 더욱이 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엮어가는 문학적이며 격조 높은 저자의 문장은 역사여행의 재미와 신기함을 넘어서 몽환의 세계에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다.
야간통행금지가 풀린 장안의 봄풍경
누구 집인들 달을 보고 한가로이 앉아 있을 수 있으리?
어디선들 등 이야기 듣고 보러 오지 않으리? (최액[崔液], <밤놀이>[夜遊])
장안의 봄밤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성대하게 펼쳐진 대표적 세시풍속은 상원, 즉 정월 대보름을 전후한 며칠간 계속되었던 관등(觀燈) 행사이다. 봄기운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이 시기가 되면 궁전이나 귀족의 저택은 물론 일반 사족과 서민의 집까지 대문마다 등을 밝히고 온갖 모양의 만등(萬燈)이 거리를 비추어, 장안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오늘날에는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성대한 규모의 축제가 펼쳐졌다. 당시의 행사가 얼마나 요란하고 화려했는지, 밤놀이를 나온 인파 때문에 "거마가 길을 메워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채 몇 십 걸음씩 떠다니"기도 했으며, 이 며칠간의 유희를 위해 "서로 호기를 부리며 재물을 마구 써대다가 파산지경에 이르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말쑥하게 빼입고 짙게 화장한 장안의 선남선녀들을 이렇게 밤거리로 불러낸 것은 만등의 눈부신 불빛만이 아니었다. 평상시에는 엄격하게 시행되던 야간통행금지가 정월 15일을 전후한 이 며칠간 해제되었다는 사실이 아마도 가장 주요한 이유일 것이다. "환락의 즐거움 다함이 없어, 노래하고 춤추며 새벽에 이른다"(최지현[崔知賢], <상원일 밤>[上元夜])는 시인의 말에서, 이 둘도 없는 기회를 만난 사람들의 들뜬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농염한 모란꽃 사람 마음을 뒤흔들어,
온 나라가 미친 듯 돈을 아까워 않네 (왕예[王叡], 모란[牧丹])
장안의 봄을 화려하게 수놓은 것은 관등뿐이 아니었다. 도시 곳곳에서 탐스러운 자태를 뽐내던 모란은 장안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나라 전체가 이 꽃에 취해, 모란이 필 무렵이면 꽃구경을 나서는 사람들로 장안이 들썩였으며 부자들은 한 송이 모란을 사기 위해 수십 수천 전(錢)을 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순전히 모란 때문에 유명해진 사찰과 정자, 개인의 저택이 장안에서만도 여기저기 있었다는 점은 당시 사람들의 모란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말해준다.
3월 삼짇날 날씨는 쾌청하고,
장안의 물가에는 미인이 많구나 (두보[杜甫], 미인의 노래[麗人行])
모란만큼 화려하고 모란만큼 사랑을 받으며 명성을 떨치던 가기(歌妓)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장안의 명물이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운영되던 사설 기관(妓館)의 민기(民妓) 외에도, 궁전을 위해 설치된 궁기(宮妓), 관아에 배속된 관기(官妓), 고위 관료와 부호들이 두고 있던 가기(家妓) 등 여러 종류의 기녀들이 수려한 용모와 뛰어난 재예(才藝)로 뭇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들로 인해 재산을 탕진하고 인생을 망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나 기녀들에 빌붙어 사는 남자들이 있었다는 것, 양가집 처자들을 사고파는 인신매매꾼들이 있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데, 매년 봄 새롭게 진사시에 급제한 수재들이 기녀를 양성하는 교방(敎坊)에서 기녀들을 빌려다 크게 잔치를 열었다는 이야기, 전근을 가거나 은퇴하는 지방관리가 맘에 드는 관기를 데려갈 수 있었다는 점, 장안 안에서도 일류 기녀가 사는 동네와 삼류 기녀가 사는 동네가 따로 있었다는 사실, 재색을 겸비한 최고의 기녀를 부를 때는 고관들도 그녀의 이름이 아닌 자나 호를 사용하여 존중해주었다는 이야기 등은 당시의 풍류를 엿보게 한다.
장안 시민들의 놀이문화
상원절에 당시 사람들을 매료시키던 구경거리는 관등행사만이 아니었다. 이 날이 되면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어디서건 발하(拔河), 즉 줄다리기 놀이를 했다. 원래 특정한 날만 행하는 종교적 의미의 행사에서 시작된 줄다리기는 당대에 이르면 완전한 유희로서 변모하여 장안 등지에서는 제왕과 황비 등의 심심풀이로도 제공되어, 역사서를 보면 황제가 궁녀들의 발하를 구경했다거나 직접 시신(侍臣)들에게 발하놀이를 하도록 명했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줄 위에서 공이나 칼을 던지면서 곡예를 부리는 승기(繩伎, 줄타기)도 대도시의 시장이나 놀이마당 등에서 갈채를 받으며 공연되었는데, 화려하게 단장한 미녀들이 줄 양쪽에서 함께 재주를 부렸다는 당시의 기록을 보면 번쩍이는 의상을 입고 높은 그네에 매달린 채 아슬아슬한 묘기를 선보이는 오늘날의 서커스를 연상하게 된다. 또 성대한 국가의 대전(大典)에서 수십·수백 명의 무희들이 함께 갖가지 글자를 표현해내는 군무(群舞)인 자무(字舞)는 오늘날의 매스 게임과도 흡사하다.
당대의 유희에도 역시 연회와 주흥이 빠지지 않았다. 이 시기의 음주 관습에는 몇 가지 재미난 점이 있었다. 우선 잔치자리에서 식사와 음주를 구분하여 요리를 먹고 나서 술을 마시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술자리에서 술을 받은 사람은 바로 술잔을 들어야 했으며, 한 사람씩 순서대로 술을 마셨으므로 술을 받은 사람이 잔을 들지 않으면 다음 손님에게 술을 따를 수 없었다. 술기운이 오르면 춤과 노래, 흉내내기 따위의 장기자랑이 행해졌다. 또 종종 주호자(酒胡子, 바닥이 뾰족해 세우면 곧바로 쓰러지는 인형)라는 일종의 장난감을 가지고 술 마실 사람을 정했으며, 오늘날 "간장공장공장장은 장공장장" 같은 발음하기 힘든 말 빨리하기 같은 놀이를 해서 벌주를 먹이기도 했다.
그 밖에도 당대 남성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호희(胡姬)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소그디아나·투카라 등지에서 당나라에 들어와 있던 이란계 여성들로 추측되는 이들은 푸른 눈에 하얀 피부로 장안의 술집에서 당나라 가기들과는 또 다른 이국적 아름다움으로 장안 남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으며, 그 증거로 시인과 묵객들은 이들을 노래하는 많은 시가를 남겼다.
이국취미의 유행과 활달했던 당대 여성들
호희라는 독특한 존재에서도 알 수 있지만, 당대는 이국취미(exoticism)가 크게 유행한 시대였다. 종교, 음악, 회화를 비롯해 당나라 사람들의 의식주 생활 깊숙이 서역풍이 스며들었다. 귀인들의 밥상에는 호식(胡食, 서역풍 식사)이 올랐고, 페르시아산 술을 명품으로 쳤으며, 남녀 모두 옷깃을 접은 저고리를 입고 망토 같은 것을 두르는 페르시아식 복장을 했다. 건축물의 장식 도안에도 서역풍의 장식이 즐겨 사용되었다.
특히 당대의 여성은 이런 서역풍의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머리를 높게 올려 쪽을 찌는 계퇴(톂堆)나 뺨을 붉게 칠하는 화장법도 그렇고, 품이 좁은 저고리와 머리장식도 모두 서역의 영향이 역력했다. 호모(胡冒)를 쓰고 얼굴을 드러낸 채 말을 타고 나들이 가는 당대 여인들의 모습은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말을 즐겨 타다 보니 자연스레 남장이 유행하게 되었고, 옅은 화장을 해서 심지어 화장기 없는 얼굴을 세련된 품격으로 생각했으며, 폴로(polo)의 전신이라 할 만한 타구(打毬) 같은 격렬한 스포츠나 사냥을 즐기는 여성들도 많았다. 이렇듯 당대 여성들의 활달함은 전례가 없는 일일 뿐 아니라 송대 이후의 남녀 유별한 유교문화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당대의 도서 수집 열풍
당대에는 오늘날처럼 책을 진열해놓고 파는 서점이 있었고, 오늘날의 책 마니아 못지않게 엄청난 장서를 자랑하는 애서가들이 있었다. 한번에 수만 권을 찍어낼 수 있는 인쇄기가 아직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긍(吳兢)·장예(蔣乂)·위술(韋述) 등은 "사람을 사서 베끼고 직접 교정해서" 모은 책이 2∼3만 권에 이르렀다고 하니 책에 눈먼 사람들이 "명류의 옛 문집, 옷을 전당 잡혀 샀다"고 읊은 이함용(李咸用)의 시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이들 애서가들은 단지 책을 모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첨(牙籤) 등을 이용해 서고를 정리하고 도서목록까지 손수 만들었다. 중당(中唐)의 고관 유공작(柳公綽)은 경(經)·사(史)·자(子)·집(集)의 각 책을 세 본씩 갖춘 뒤 가장 좋은 한 본은 서고에 잘 모셔 영구보존하고, 다른 한 본은 평상시에 들춰보는 참고용으로, 나머지 한본은 자제와 후학들의 학습용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개방성과 다양성이 새로운 문화를 꽃 피운다
비록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은 한 나라의 문화가 발전하고 융성하기 위해서는 자기와는 다른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개방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개방성은 외부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스스로를 자극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밑거름이 된다. 그것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다양성을 인정하는 자세를 갖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당대 문화의 저변에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시대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이를테면 남녀의 차별이나 이민족에 대한 차별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당대 문화는 오늘날 문화비평가들이 말하는 잡종적인(hybrid) 문화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혼성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개방성과 다양성은 궁극적으로 가치관과 정체성의 혼란을 초래하기보다는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이 책은 역사적으로 예증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저자  이시다 미키노스케(石田幹之助)

1891년 일본 지바(千葉) 시에서 태어났으며 도쿄 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세계적인 동양학 전문도서관 동양문고(東洋文庫)를 설립·육성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일본 동양학 연구의 선구자로서 중국사 다방면에 걸쳐 연구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당대(唐代)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는 독보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학자로서뿐 예리한 관찰력을 지닌 빼어난 문장가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1974년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歐人の支那硏究>, <東亞文化史叢考>, <石田幹之助著作集> 등이 있다.

북리뷰

 제목게재지글쓴이날짜
01 일본 동양학 대가가 바라본 '장안'연합신문김경희2004.6.18
02 포용과 개방의 唐문화 소개문화일보최영창2004.6.25
03 [손에 잡히는 책]장안의 봄국민일보정철훈2004.6.25
04 화려한 제국의 도시, 장안 감상하기동아일보김형찬2004.6.26
05  '열린 제국' 唐의 문화∙풍속 재현한국일보 2004.6.26
06 양귀비의 몸매 비결은 '타구'경향신문조장래2004.6.26
07 고문헌서 되살려낸 당 장안 풍경한겨레최재봉2004.6.26
08 손에 잡힐 듯한 1천년 전 풍경부산일보이상헌2004.6.29
09 풍류 넘치는 장안의 생생한 봄 풍경조선일보이한우2004.7.03

이산의책 29 원시적 열정

원시적 열정
레이 초우 지음 / 정재서 옮김
2004년 4월 16일 / 본문 360쪽 / 값 18,000원
'여성'과 '아시아'를 원시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종래의 민족지적 시선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시선의 대상으로 드러내는 새로운 민족지 또는 포스트콜로니얼 세계의 문화번역으로서의 현대중국영화 읽기. 영화비평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이론적 정교함을 보여주는 문화연구의 압권. 

루쉰이 본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은 너무나도 유명한 루쉰의 충격적인 체험을 재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강의가 일찍 끝날 때, 선생님은 종료시간까지 자연풍경이나 뉴스 슬라이드를 보여주곤 했다. 당시는 러일전쟁 중이었고 그래서 전쟁에 관한 영화[슬라이드]가 많았다. 나는 강의실에서 다른 학생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환호하면 따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고 있던 영화에 오랜만에 중국인 몇 명이 나왔다. 그들 중 한 명은 묶여 있었고 그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 모두는 체격이 건장했지만 무감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설명에 의하면 손이 묶인 사람은 러시아의 스파이 노릇을 한 자로 본보기로서 공개적으로 일본군에 의해 참수될 참이었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이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모여 있었던 것이다. 그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나는 도쿄를 향해 떠났다. 이 영화를 본 뒤부터 의학 따위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약소한 후진국 국민은 아무리 몸이 튼튼해도 이처럼 무의미한 본보기의 대상이나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이 병으로 많이 죽어간다 해도 큰 문제는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을 개조하는 일이다. 당시 나는 문학이야말로 그런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문학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소설집 <납함>의 '자서'에서 밝힌 이 루쉰의 체험은 지금까지 중국근대문학의 아버지 루쉰이 문학에 투신하게 된 동기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인 장면으로 해석되어왔고, 수많은 중국문학 비평가들은 루쉰의 이 고백에 감동 어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비평가들의 그런 문학적인 해석에는 무언가 간과된 측면이 있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 레이 초우는 지금껏 절대진리로 받아들여졌던 이 루쉰의 고백에 대한 문학적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루쉰이 받은 시각적 충격에 주목한다. 루쉰은 자기나 자기의 동포들이 세계의 눈에는 구경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국민의식을 깨달았으며, 동시에 새로운 강력한 미디어가 전통적인 문학의 역할을 빼앗고 그것을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레이 초우는 루쉰의 문학 안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이미지의 역할에 주목하고 루쉰의 문학을 문자와 시각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원시적 열정
이러한 역사와 문화의 변혁기, 즉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전통문화의 기호를 대체하는 때 등장하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원시적 열정'(primitive passions)이다. 여기서 '원시적'이라는 말에는 이중의 의미가 각인되어 있다. 어떤 권위를 가진 '기원' 혹은 '낙후된 것.' 따라서 '원시적 열정'은 잃어버린 순수한 기원 혹은 뒤쳐진 어떤 것으로서의 '원시적인 것'을 되찾고자 하는 정념이다. 이 '원시적인 것'은 문화변혁기에 시간과 언어의 개별성을 뛰어넘어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공통의 기반으로 상상되거나 발명된다. 그것은 늘 환상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페티시즘이나 이국취미 또는 오리엔탈리즘의 형태를 띤다. 저자가 이 책에 '원시적 열정'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타자 안에서 '낙후성'이나 '기원'을 찾으려고 하는 서양적인 응시에 대한 비판을 시사하기 위해서이다. 중국에서 근대는 이런 서양적인 '원시적 열정'을 스스로 내재화하는 과정이자 결과로 나타난다. 저자는 중국 안에 '제1세계'적 제국주의와 '제3세계'적 내셔널리즘이 공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레이 초우는 중국영화 안에서 원시적인 것이 머무르는 장소로 '여성' '자연' '어린이'에 주목한다. 1930년대 롼링위(玩玲玉) 주연의 무성영화에서부터 1960년대 문화대혁명기 마오쩌둥과 홍위병의 모습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이미지를 거쳐, 1980년대 천카이거(陳凱歌)와 장이머우(張藝謀) 등의 영화를 공동체, 국가, 일, 학습, 사랑, 혁명, 젠더 등과 같은 범주가 뒤섞이는 교차점으로 읽으려고 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녀의 논의가 단연 돋보이는 것은 그녀가 영화제작과 유통이라는 국제영화시장에서의 권력구조의 문제, 다시 말해서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경제적·권력적 격차라고 하는 문화정치학의 근본문제까지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오늘날 문화비평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다양한 화두―내셔널리즘, 오리엔탈리즘, 페미니즘, 섹슈얼리티, 페티시즘, 정체성, 해체, 포스트콜로니얼, 문화표상, 미디어, 시각(視覺), 민족지 등등―와, 수많은 사상가들―마르크스, 프로이트, 하이데거, 그람시, 벤야민, 푸코, 알튀세, 제임슨, 데리다, 아탈리, 스피박 등등―의 담론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진지하고 정교하게 자신의 논의에 이용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영화제작을 둘러싼 다양한 문화적·정치적 상황을 포함시켜 영화를 '정독'하는 레이 초우의 자세와, 스크린 상의 이미지만을 끄집어내서 '정독'하는 태도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그녀의 독해는 이미지를 세부적으로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 위에서 인종, 젠더, 민족성(ethnicity) 등과 같은 문화비평의 틀을 비판적으로 적용한다. 즉 이미지 비평도, 주제 비평도 아닌 제3의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문화번역
레이 초우가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는 서양에서 비서양을 향한 응시에 기초한 일방통행적인 민족지를 비판한 3부이다. 그녀가 서문에서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지만, 현대중국영화라는 이 책 전체의 관심사와, 3부의 서양중심적인 민족지에 대한 비판 사이에는 얼핏 거리감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3부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현대중국영화와 민족지를 구분하여 별개의 것으로 다루는 권력적인 행위를 이 책은 문제 삼고 있다.
그녀의 비평의식이 어떤 문화를 '타자'로 삼아서 논하는 사회조직이나 담론의 구조를 비판하고 그것의 변혁을 지향하고 있음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발터 벤야민의 번역론을 근거로 그녀는 현대중국영화가 포스트콜로니얼 세계에서 문화번역―서로 다른 문화권끼리, 서로 다른 계급문화끼리, 서로 다른 미디어끼리의 교섭과 경합―의 획기적인 예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번역'의 관점을 결여한 영화론이나 문화론은 사회조직이나 담론구조의 정치적·경제적 역학을 분석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레이 초우의 관심은 하나하나의 영화작품을 논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현대중국영화와 같은 문화를 '타자'적이고 '원시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하는 영화비평과, 서양 이외의 문화를 타자화하는 기존의 민족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태도 사이의 유사성을 낱낱이 파헤치는 데 있다. 나아가 그녀는 메리 루이스 프랫의 '자기민족지'(auto-ethnography)라는 개념을 차용하여 '타자'의 시선을 중심에 둔,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객체'의 이항대립을 허물어뜨리는 양방향적인 새로운 민족지로 현대중국영화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자기를 보는 새로운 시선
이 책은 이른바 제3세계 영화에서 두 가지 측면, 즉 영상 이미지의 해석과, 반(反)오리엔탈리즘 혹은 반제국주의 비평담론이 양방향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정치적 비평의 방향으로 영화연구의 지평을 넓혀간다. 이런 방향성을 가진 영화론은, 이를테면 단순히 오리엔탈리즘적인 경향을 영화의 스토리나 주제에서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상의 이미지가 얼핏 오리엔탈리즘을 재생산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세부에서는 그것을 내파(內破)하는 전술이나 비판이 있다는 데 주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국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매혹시킬 것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홍수 속에서 국내 대중과 비평가의 호응을 받지 못했거나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주목받은 영화들, 특히 다큐멘터리적인 영화와 저예산 영화에 대한 '정독'에 큰 기여를 할 것이고, 영화 제작과 유통의 권력구조가 반영된 영화비평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레이 초우(Rey Chow)

1957년 홍콩에서 태어났다. 홍콩 대학을 졸업하고 스탠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네소타 대학과 캘리포니아 대학(어바인) 교수를 거쳐 현재 브라운 대학 교수이다. 전공은 미디어론과 비교문학. 저서로 Woman and Chinese Modernity (1991), Writing Diaspora (1993) 등이 있다. 이 책 <원시적 열정>은 미국 내 언어학연구자와 문학연구자의 학회 중에서 가장 큰 단체인 근대언어협회(MLA)에서 매년 가장 우수한 연구서에 수여하는 '제임스 러셀 로웰 상'을 수상했다. 아시아 관련서 그리고 영화를 다룬 책에 이 권위 있는 상이 주어지기는 이 책이 최초이다.

북리뷰

 제목게재지글쓴이날짜
01 시각으로 본 근현대로의 이동문화일보유숙렬2004.4.22
02 중국 근현대 영화 속에 담은 진실조선일보박은주2004.4.24
03 문화번역으로서의 현대 중국영화 읽기씨네21표정훈2004.5.04

이산의책 28 세계화의 원근법

세계화의 원근법
강상중∙요시미 슌야 지음 / 임성모∙김경원 옮김
2004년 1월 9일 / 본문 256쪽 / 값 12,000원

*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권장도서
날카로운 지성의 두 연구자가 면밀한 논의를 거듭하여 공동으로 집필한 참신한 현대일본사회론. 세계화시대에 나타난 다양한 수준의 변화를 독해하면서,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전지구적 지각변동의 의미와 바람직하고 새로운 공공공간의 모습을 탐색한다. 

일본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행정개혁' '규제완화' '세계표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 구호들을 귀가 아프게 들어 왔다. 한때는 국제화라고 부르다가 이제는 세계화로 거의 통용되는 'globalization'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과제들이다. 그런데 세계화가 부여한 이런 과제는 세계화라는 말답게 우리의 발등에만 떨어진 불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도 이와 똑같은 구호가 유행하고 있다. 금융기관 파산, 구조조정, 실업자 양산, 소득격차 확대, 사회보장제도 동요 등 세계화가 초래한 사회불안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디 그뿐인가. 정부의 권위가 약화되어 국가시책 자체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이나 지방의 노골적인 반발을 사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핵 폐기장이나 쓰레기 소각장 같은 혐오시설의 설치를 둘러싼 갈등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일본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세계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세계표준'(global standard)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보통 그것을 '미국표준'(American standard)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책의 두 저자는 그런 단순한 동일시에 반대한다. 세계화가 미국이 패권을 장악하고 그것을 확대해 나가는 단선적인 과정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세계화를 거시적·미시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20세기라는 공간을 전체적으로 보아야 하며, 그렇게 보았을 때 그 공간에는 여러 개의 단층―두 차례의 세계대전, 냉전, 사회주의의 몰락 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단층은 서로 겹쳐지고, 여러 개의 층을 이루어 지금과 같은 변화의 흐름을 복합적으로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화는 똑같은 시각과 시야에서 보아서는 안되며 원근법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혼성화 사회로 나아가는 일본
세계화의 원근법을 통해 두 저자는 일본사회의 어떤 변화를 포착하고 있는가? 이 책의 머리말과 1장 그리고 마지막의 대담을 제외한 5개의 장이 바로 이에 대한 각론이다. 5개의 장은 각각 하나의 주제를 설정해서 논의하고 있는데, 여기서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학문적 도구는 문화의 정치학과 정치경제학이다. 단 정치경제학보다는 문화의 정치학에 더 많은 비중이 두어져 있는데, 그것은 저자들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이 자료분석을 통해 쓰여졌다기보다 발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이론적이면서도 대단히 시사성이 많다. 그리고 그 점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세계화에 관한 책은 무수히 많은데, 하나의 논점을 강요하지 않지만 분명한 시각을 가지고 일본사회라는 구체적인 세계화의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들을 분석하고 전망한 책은 없기 때문이다.
각각의 주제를 상세히 설명하는 대신 전편에 걸쳐서 저자들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세계화는 근대 국민국가체제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강화한다. 자본과 정보와 인간의 교환이 국경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빈번해지는 한편에서 각국은 저마다 국익을 강조하며 눈에 보이는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경쟁과 충돌을 벌이고 있다. 일본의 경우 네오내셔널리즘이 기승을 부리는 것도 세계화에 의해 초래된 위기의식의 표출로 저자들은 분석한다.
그러나 국가경제의 침체와 정체성의 위기 속에서, 기존의 공공공간국가중심의 공공공간이 와해되는 혼돈의 틈바구니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공공공간에 주목한다. 즉 일본이라는 국가공간에서 사각지대로 내몰렸던 마이너리티의 공공공간, 거대도시에 떠밀렸던 소도시와 지방의 공공공간에서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새로운 공공공간은 국경을 초월해서 네트워크화할 수 있으며, 이제는 정치·경제·문화 모든 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잠재력을 갖게 되었다. 그 하나의 예로 저자들은 전세계 코리아계 사람들의 네트워크 형성 가능성을 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은 본국(한국)의 정체성을 확대하는, 다시 말해서 한국민족주의를 확대하는 네트워크가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이 혼재하는 네트워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작은 움직임들이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일본사회에 나타나고 있으며 침체된 일본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지금, 마이너리티의 민족사업(ethnic business)은 호황을 구가하고 있으며, 일본의 거대한 국민적 미디어들(NHK나 중앙 일간지들)이 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우경화의 길을 걷는 반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민족미디어(ethnic media)는 현장의 생생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은 20세기라는 시간의 두께와 20세기 공간이라는 공간적 중층성을 바탕으로 세계화의 패러독스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두 가지 목소리—"세계화만이 살 길이다"라고 주장하는 세계화 옹호론과, "세계화는 미국의 패권을 강화할 뿐이다"라고 세계화를 일축해 버리는 세계화 반대론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세계화는 국민국가나 내셔널리즘을 해체할 가능성도 있고 강화할 가능성도 있음을 이 책은 강조하기 때문이다. 표면상 후자의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일본사회에서 두 저자는 그 이면에 꿈틀대고 있는 전자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일본사회가 혼성화사회로 나아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면 우리는 세계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우리 사회의 좌표는 어디쯤일까? 우리는 세계화의 어떤 가능성을 지향해야 하는가?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문제의식이다.

저자 

강상중(姜尙中)
1950년 일본 구마모토(熊本) 현에서 태어났다. 1979년 와세다 대학 대학원 정치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도쿄 대학 사회정보연구소 교수이다. 전공은 정치학과 정치사상사. 저서로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1997), <동북아 공동의 집을 향하여>(2002), <내셔널리즘>(2004) 등이 있다.

요시미 슌야(吉見俊哉)
195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 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도쿄 대학 사회정보연구소 교수이다. 전공은 사회학과 문화연구. 저서로 <博覽會の政治學>(1992), <メディア時代の文化社會學>(1994), <カルチュラル·スタディ―ズ>(200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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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복수(複數) 세계화 구조 분석교수신문백승욱200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