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프랑스, 미국 같은 강대국들의 압력에 일순 굴복하는 듯하다가도, 결국에는 오뚝이처럼 일어나 승리를 쟁취하고 마는 베트남의 저력과 역사를 추적한 발군의 통사.
베트남 역사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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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베트남 최초의 국가는 반 랑이며, 건국의 아버지는 훙 브엉이다. 또한 베트남 사람들은 훙 브엉의 부모인 락 롱 꿘과 어우 꺼를 그들의 시조로 여긴다. 그런데 훙 브엉의 아버지 락 롱 꿘은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신농씨의 3대손인 데 민의 손자이다. 이처럼 중국은 베트남 역사의 기원에서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반 랑이 자리했던 홍 강 하류의 광활한 델타에는 이미 중국문화가 침투하기 훨씬 전부터 다양한 종족의 문화가 혼합된 독자적인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델타의 농지를 일컬어 락전이라 하고, 락전의 경작민을 락민이라 하는데, 바로 이 락민의 문화가 베트남 전통문화의 원형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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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전의 베트남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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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19세기 이전의 베트남 역사는 '북거남진'(北拒南進)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여기서 북은 중국을, 남은 지금의 베트남 중부와 남부를 가리키므로, 풀이하면 중국의 침략에 대항하고 남쪽으로 팽창해 나간 역사라는 뜻이다. 베트남 역사 초기에 베트남의 다수민족인 비엣족(越族)의 영역은 홍 강 델타와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통킹 지방과 지금의 중국 광시 성 구이린(桂林) 및 광둥 성 광저우(廣州) 일대에 걸쳐 있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의 역대 왕조는 이 지역에 대한 정복욕이 강했다. B.C. 111년 한나라는 이 지역의 남 비엣(南越)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곳을 중국의 지배 아래 두게 되었다. 이후 중국의 지배는 A.D. 939년까지 약 1천년 동안 계속되었다. 따라서 이 기간을 베트남 역사에서는 중국지배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중국지배기 동안에도 베트남인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저항운동은 놀랍게도 두 여성, 쯩 짝과 쯩 니 자매가 일으킨 것이다(A.D. 40).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 사건은 유교사회와는 전혀 다른 베트남 전통사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지금도 베트남 사람들은 쯩 씨 자매를 추앙하고 있다. 베트남이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은 939년 응오 꾸옌이 응오(吳) 왕조를 세우면서부터이다. 이후 400년간 딘(丁) 왕조, 띠엔 레(前黎) 왕조, 리(李) 왕조, 쩐(陳) 왕조 등이 차례로 명멸해 갔다. 1407년에는 다시 중국 명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그것은 잠시였고 1418년에 명의 군대를 몰아내고 레(黎) 왕조가 등장했다. 레 왕조는 1788년 멸망할 때까지 베트남 왕조로서는 가장 오랜 세월인 360년간 존속했는데, 특히 타인 똥(聖宗, 1460∼1497) 때 가장 큰 번영을 누렸다. 베트남 역사에서 타인 똥은 우리 역사에서 세종대왕에 견줄 만한 인물로, 대내적으로 왕조의 제도를 완비하고, 대외적으로 남쪽의 참파(지금의 베트남 남부지방에 있었던 소수민족 왕국)를 정벌하여 영토를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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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남진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북쪽의 통킹 지방에서 북위 17도선까지 진출한 것이 1070년이었고 남부의 사이공을 포함하는 이른바 안남 지방을 완전히 석권한 것은 1699년이었으며, 사이공 이남에 해당하는 이른바 코친차이나까지 병합한 것은 18세기 중반(1757)의 일이었다. 따라서 베트남의 경계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레 왕조의 뒤를 이은 응우옌(阮) 왕조에 와서이다.
1802년에 수립된 응우옌 왕조는 북쪽의 중국에 대해서는 큰 경계를 했지만 남쪽의 바닷길을 통해 들어오는 프랑스 선교사들과 상인들에 대해서는 별로 경계를 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외부의 위협은 항상 중국 대륙에서 왔지 남쪽의 바다에서 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유럽 국가들의 진출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베트남이 유독 프랑스에 대해서만 관대했던 것은 응우옌 왕조 수립 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응우옌 왕조를 지원한 것과 관계가 있다. 더구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베트남 문화에 적잖은 공헌을 했다. 예를 들면, 현재 베트남에서 사용하고 있는 로마자화된 베트남 문자를 처음 만든 사람도 프랑스 선교사였다. 그러나 이런 우호적인 관계는 프랑스의 침략적인 팽창정책에 의해 깨져 버리고, 응우옌 왕조는 국권을 상실한 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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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대와 베트남 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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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는 과정과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는 과정을 비교해 보면 일본이 프랑스한테 배운 게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둘이 닮아 있다. 특히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관계를 끊고, 국제법에 입각한 진정한 독립국으로서 합법적인 외교관계를 다시 수립한다는 미명 아래 보호국화했다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식민정책에 있어서 처음에는 강압적인 정책을 취하다가 베트남인의 저항이 거세지자 프랑스와 베트남의 '협력'을 강조하는 유화정책을 실시한다는 점도, 3·1운동 이후 일본이 식민정책에 변화를 보인 것과 비슷하다.
베트남의 반식민주의 운동은 처음에는 전통적 지식인이 주체가 되어 외국인에 대한 배타성과 유교적 충성심을 바탕으로 전개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초기 베트남 민족주의 운동의 주역은 판 보이 쩌우와 판 쭈 찐이었다. 이들은 전통적 지식인의 마지막 세대로서, 일본과 중국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선구자들이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자 근대적인 프랑스식 교육을 받은 새로운 지식층이 등장했다. 이들은 대개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무력에 의한 독립쟁취를 모색하는 급진적인 경향의 운동가들이 나타났다. 이런 경향을 띤 최초의 조직이 떰 떰 싸(心心社)였다. 떰 떰 싸는 1924년 6월 프랑스 총독의 암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하고 말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반식민주의 투쟁은 보다 대중적이고 혁명적으로 변화해 나갔다. 그 중심에 선 사람이 유명한 호 찌 민이었다. 호 찌 민은 떰 떰 싸를 흡수하여 1925년에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베트남혁명동지회를 결성하고, 이후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과 반제투쟁을 이끌면서 베트남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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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과 분단 그리고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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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독립이 현실화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이 임박해지면서부터이다. 이미 1941년에 결성된 베트민(越盟)을 통해 베트남 내의 저항운동을 한 단계 끌어올렸던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총봉기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 신속하게 이른바 '8월혁명'을 개시했다. 혁명의 전면에 나선 것은 역시 베트민이었다. 8월 19일 베트민은 하노이를 장악하고 8월 25일에는 남부의 사이공까지 영향력 아래 두었으며, 8월 30일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가 모든 권한을 상징하는 황금 보도를 베트민 대표에게 넘겨주었다. 사흘 뒤인 9월 2일 호 찌 민은 하노이에서 마침내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포츠담 회담의 결정에 따라 북부와 남부에 각각 중국 국민정부군과 영국군이 진주했고, 영국의 지지를 받는 프랑스는 식민지 복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특히 코친차이나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합의점을 찾지 못한 베트남과 프랑스는 1946년 말 전쟁에 돌입했다. 군사력에서 우세했던 프랑스는 승리를 낙관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예상은 빗나갔다. 결국 1954년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는 베트남에 항복하고,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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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베트남은 완전 독립을 달성하는가 싶었지만 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원래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북부 베트남과 많이 달랐던 남부 베트남이 제네바 협정을 거부했고 미국이 협정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베트남은 분단의 운명을 겪게 되었다. 미국은 애당초 베트남에 개입할 의사가 별로 없었으나 1949년 중국공산당이 대륙을 석권하자 베트남마저 공산화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프랑스를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 제네바 협정을 계기로 프랑스의 자리를 대신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우선 미국은 남베트남에 반공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응오 딘 지엠 정권의 베트남 공화국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미국의 개입은 사이공 정권에 대한 엄청난 경제원조와 전쟁의 확대로 이어졌지만 결국에는 미국도 프랑스와 똑같은 운명을 걷게 되었다. 지은이는 미국이 어떻게 전쟁을 수행했는지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그 과정이 최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보복공격과 너무 닮아서 놀라게 된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약소국을 상대로 하는 전쟁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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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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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베트남의 역사를 개괄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와 베트남의 관계, 특히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견하게 된 배경과 과정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지금도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만 있을 뿐 우리 역사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온 이 민감한 부분을 평가하기에 앞서서 하나의 역사로 자리매김시킨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유인선
1941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미시간 대학교에서 동남아시아 역사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에서 사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베트남사>(1984), Law and Society in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y Vietnam(1990)이 있고 논문으로 <중월관계와 조공제도―가상과 실상>, <전근대 베트남인의 역사인식> 등 다수가 있다.
북리뷰
| 제목 | 게재지 | 글쓴이 | 날짜 |
01 | 미지의 나라 베트남의 정체성 | 조선일보 | 김기철 |
200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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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 베트남 '체스판'서 벌인 국제정치'게임' 묘사탁월 | 한겨레신문 | 백영서 |
200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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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펴낸 유인선교수 | 동아일보 | 조이영 |
200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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