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행정개혁' '규제완화' '세계표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 구호들을 귀가 아프게 들어 왔다. 한때는 국제화라고 부르다가 이제는 세계화로 거의 통용되는 'globalization'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과제들이다. 그런데 세계화가 부여한 이런 과제는 세계화라는 말답게 우리의 발등에만 떨어진 불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도 이와 똑같은 구호가 유행하고 있다. 금융기관 파산, 구조조정, 실업자 양산, 소득격차 확대, 사회보장제도 동요 등 세계화가 초래한 사회불안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디 그뿐인가. 정부의 권위가 약화되어 국가시책 자체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이나 지방의 노골적인 반발을 사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핵 폐기장이나 쓰레기 소각장 같은 혐오시설의 설치를 둘러싼 갈등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일본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세계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세계표준'(global standard)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보통 그것을 '미국표준'(American standard)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책의 두 저자는 그런 단순한 동일시에 반대한다. 세계화가 미국이 패권을 장악하고 그것을 확대해 나가는 단선적인 과정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세계화를 거시적·미시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20세기라는 공간을 전체적으로 보아야 하며, 그렇게 보았을 때 그 공간에는 여러 개의 단층―두 차례의 세계대전, 냉전, 사회주의의 몰락 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단층은 서로 겹쳐지고, 여러 개의 층을 이루어 지금과 같은 변화의 흐름을 복합적으로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화는 똑같은 시각과 시야에서 보아서는 안되며 원근법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혼성화 사회로 나아가는 일본
세계화의 원근법을 통해 두 저자는 일본사회의 어떤 변화를 포착하고 있는가? 이 책의 머리말과 1장 그리고 마지막의 대담을 제외한 5개의 장이 바로 이에 대한 각론이다. 5개의 장은 각각 하나의 주제를 설정해서 논의하고 있는데, 여기서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학문적 도구는 문화의 정치학과 정치경제학이다. 단 정치경제학보다는 문화의 정치학에 더 많은 비중이 두어져 있는데, 그것은 저자들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이 자료분석을 통해 쓰여졌다기보다 발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이론적이면서도 대단히 시사성이 많다. 그리고 그 점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세계화에 관한 책은 무수히 많은데, 하나의 논점을 강요하지 않지만 분명한 시각을 가지고 일본사회라는 구체적인 세계화의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들을 분석하고 전망한 책은 없기 때문이다.
각각의 주제를 상세히 설명하는 대신 전편에 걸쳐서 저자들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세계화는 근대 국민국가체제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강화한다. 자본과 정보와 인간의 교환이 국경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빈번해지는 한편에서 각국은 저마다 국익을 강조하며 눈에 보이는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경쟁과 충돌을 벌이고 있다. 일본의 경우 네오내셔널리즘이 기승을 부리는 것도 세계화에 의해 초래된 위기의식의 표출로 저자들은 분석한다.
그러나 국가경제의 침체와 정체성의 위기 속에서, 기존의 공공공간—국가중심의 공공공간—이 와해되는 혼돈의 틈바구니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공공공간에 주목한다. 즉 일본이라는 국가공간에서 사각지대로 내몰렸던 마이너리티의 공공공간, 거대도시에 떠밀렸던 소도시와 지방의 공공공간에서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새로운 공공공간은 국경을 초월해서 네트워크화할 수 있으며, 이제는 정치·경제·문화 모든 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잠재력을 갖게 되었다. 그 하나의 예로 저자들은 전세계 코리아계 사람들의 네트워크 형성 가능성을 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은 본국(한국)의 정체성을 확대하는, 다시 말해서 한국민족주의를 확대하는 네트워크가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이 혼재하는 네트워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작은 움직임들이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일본사회에 나타나고 있으며 침체된 일본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지금, 마이너리티의 민족사업(ethnic business)은 호황을 구가하고 있으며, 일본의 거대한 국민적 미디어들(NHK나 중앙 일간지들)이 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우경화의 길을 걷는 반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민족미디어(ethnic media)는 현장의 생생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은 20세기라는 시간의 두께와 20세기 공간이라는 공간적 중층성을 바탕으로 세계화의 패러독스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두 가지 목소리—"세계화만이 살 길이다"라고 주장하는 세계화 옹호론과, "세계화는 미국의 패권을 강화할 뿐이다"라고 세계화를 일축해 버리는 세계화 반대론—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세계화는 국민국가나 내셔널리즘을 해체할 가능성도 있고 강화할 가능성도 있음을 이 책은 강조하기 때문이다. 표면상 후자의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일본사회에서 두 저자는 그 이면에 꿈틀대고 있는 전자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일본사회가 혼성화사회로 나아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면 우리는 세계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우리 사회의 좌표는 어디쯤일까? 우리는 세계화의 어떤 가능성을 지향해야 하는가?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문제의식이다.
저자
강상중(姜尙中)
1950년 일본 구마모토(熊本) 현에서 태어났다. 1979년 와세다 대학 대학원 정치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도쿄 대학 사회정보연구소 교수이다. 전공은 정치학과 정치사상사. 저서로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1997), <동북아 공동의 집을 향하여>(2002), <내셔널리즘>(2004) 등이 있다.
요시미 슌야(吉見俊哉)
195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 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도쿄 대학 사회정보연구소 교수이다. 전공은 사회학과 문화연구. 저서로 <博覽會の政治學>(1992), <メディア時代の文化社會學>(1994), <カルチュラル·スタディ―ズ>(2001) 등이 있다.
북리뷰
| 제목 | 게재지 | 글쓴이 | 날짜 |
01 | 복수(複數) 세계화 구조 분석 | 교수신문 | 백승욱 | 2004.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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