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남부 연안지역의 린 마을에 사는 한 공산당 간부의 눈을 통해 지난 40년간 중국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개인, 나아가 한 마을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현재의 중국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미래의 중국을 가늠케 해주는 인류학적 보고서이자 드라마틱한 인생 이야기.
1949년, 그러니까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도 마오쩌둥(毛澤東), 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 세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중국현대사의 거목들임에는 틀림없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이름 없는 다수의 삶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궁극적으로 역사는 소수의 영웅이나 지도자의 행적이 아니라 묵묵히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거센 역사의 풍랑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소박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중국 푸젠(福建) 성 남부 연안의 한 농촌 마을인 린(林)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린 마을의 당 서기인 예원더(葉文德, 이하 예 서기로 지칭)를 주인공으로 해서 그 주변인물들의 인생역정으로 재구성된 중국현대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서술방식을 인류학에서는 생애사(life history)라고 하는데, 생애사의 가장 큰 미덕은 보통의 역사책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영화 <인생>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예 서기의 눈을 통해 본 중국현대사
예 서기의 눈에 비친 중국 농촌사회의 변화는 해방(1949년)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그의 집은 중농으로 분류되어 토지개혁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지만 지주와 부농은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평생을 소처럼 일만 했던 무지렁이 농사꾼이었지만, 장남만큼은 잘되어야 한다는 일념에서 학교에 보냈다. 덕분에 예 서기는 린 마을에 사는 그의 동년배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등학교 졸업자였다. 그가 군대를 갔다 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그는 어려서 사고를 당해 다리를 약간 절었다—훗날 당원이 되고 마을의 당 서기로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학력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학창시절 그의 아내를 만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연애결혼을 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닌 동창이었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졸업 후 정치운동에도 함께 뛰어들었다. 그들은 1964년 사청(四淸)운동—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일환으로 농촌지역의 무능한 간부들을 재교육하거나 제거하는 운동—에 참여하면서 정치활동가로서의 이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때 같이 활동했던 청년운동가들은 훗날 예 서기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이들이 지역사회 곳곳의 요직에 포진함으로써 예 서기는 중국에서 '관시'(關係)라고 부르는 사적인 인맥을 형성하여 마을이나 마을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큰 어려움 없이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 서기는 공산주의의 진실한 신봉자였다. 1966년에 공산당원이 되고, 1967년 말에 처음으로 생산대대 서기라는 정규직책을 얻었으며, 1975년에는 생산대대 민병대장 겸 공안주임이 되었다. 그리고 '사인방'이 체포되면서 문화대혁명이 종지부를 찍은 1978년에 생산대대 당 서기로 임명되었다. 이처럼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걷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교조적이고 맹신적인 공산당원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대단히 유연한 사고를 하고, 깜짝 놀랄 정도로 비판적인 정치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의 일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토지개혁이나 대약진운동, 또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정치운동에 대한 평가이다.
토지개혁 때 "[우리 집이]'계급의 적'이 되었더라면 나는 입당은커녕 고등학교 진학도 하지 못했을 거고요. 반대로 우리 가족이 '빈농'이나 더 낮은 계급으로 분류되었더라면 권력을 쥐고 다른 사람들을 학대하면서 끝없는 증오와 폭력의 순환고리의 한 부분이 되고픈 유혹을 받았을 겁니다. ……가끔은 계급투쟁이라는 관념, 그리고 농민을 다양한 계급으로 분류하려는 시도 자체가 우리 정부의 근본적인 실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집니다. 사람은 똑같이 태어나는 게 아니에요. 남보다 똑똑한 사람도 있고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있고요. 만약 더 열심히 일해서 토지를 축적한 사람에게 벌을 주고 어리석거나 게으른 사람에게 상을 준다면, 그것은 인민들과 다음 세대에게 잘못된 교훈을 전달하는 거예요. 해방 전에 열심히 일했던 부모나 이웃들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자란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혁신적이 되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겠어요?"
또 대약진운동 당시 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던 그는 "만약 모든 사람이 마오 주석의 지도를 열심히 따른다면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마을 용광로에 쇠를 조금씩이라도 더 보태면,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고 세상 모든 나라를 능가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우리가 대약진운동 기간에 했던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일들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믿어지지 않습니다. ……정부는 농민들에게 철강 생산량이 목표치에 도달하면 중국이 자동적으로 공산주의의 낙원으로 바뀔 것이라고 믿게 했습니다. 대중들이 단순한 정치구호에 얼마나 쉽게 넘어갈 수 있는지 당신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고 술회한다.
더 나아가 그는 "방관자로서 나는 중국 정치운동의 모순을 완전히 이해하고 평가하기 시작했어요. 항상 어느 정도 환상적이고 이상적인, 그러나 또한 지극히 단순한 구호 뒤에서 몇몇 정치인들은 청년들의 광신적인 열광을 선동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공허한 약속에 숨겨져 있던 것은 권력을 잡기 위해 투쟁하는 몇 사람의 개인적 탐욕일 뿐이었습니다. 의식하지 못한 채 청년들은 그들을 위해 최상층의 몇몇이 그려낸 이상적인 이미지에 속았던 것이지요. 청년들은 비현실적인 교의를 위해 자신들의 시간, 에너지, 때로는 목숨까지도 희생했어요. 문화대혁명의 열광과 광란을 보면서 나는 내 자신이 이전의 운동에서 이런 의식 없는 청년 중의 하나가 아니었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나는 중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하나의 역사적 과오가 아니었을까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고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하지만 집체체제에 대해서는 지지를 분명히 했다. 집체체제가 없었다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주민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일은 불가능했으리라는 것이 예 서기의 판단이다.
린 마을의 변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실용적인 입장을 견지한 예 서기는 1978년에 생산대대 당 서기로 임명되자 두 가지 개혁안을 상부(인민공사)에 건의하여 실행에 옮겼다. 하나는 생산대장을 생산대원들의 자유선거로 뽑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생산대장에게 생산대에서 발생하는 잉여의 일정 부분을 재량껏 처리하도록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었다. 이 과감한 실험은 린 마을에 유례없는 번영을 가져왔다. 각 생산대마다 경쟁적으로 기업이 생겨나 이제 린 마을은 농업일변도에서 탈피하여 다각적인 생산활동을 하는 마을로 변화해 갔다.
지은이가 처음 린 마을을 방문하여 현지조사를 행하던 때인 1985년, 린 마을의 토착주민 인구는 1,047명이었고 린 마을을 두번째 방문했을 때인 1996년에는 그보다 약간 늘어난 1,280명에 단기 이주노동자가 무려 4,000명에 달했다. 그 만큼 린 마을 사람들은 예전보다 부유해졌다. 마을 내의 범죄도 증가했다. 과거서부터 문제가 되었던 간통과 성범죄, 도박, 마약 외에 사기, 절도, 도난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빈부격차가 심해진 것은 물론이다.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호화로운 저택과 외제 승용차를 소유했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전통의 부활이었다. 예 서기는 공산주의자답게 무신론을 고수했지만 마을에서 민간신앙이 부활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또한 그 역시 풍수(風水) 만큼은 미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린 마을의 경우, 역설적이게도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해방 이후 억압되었던 전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전통과 관련해서 공산당 정부가 어쩌지 못한 또 하나의 문제가 농촌의 남아선호사상이다. 이것은 중국인의 의식 속에 너무나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러나 아들 선호가 대를 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중국의 사회복지제도와도 관련이 있다. 산아제한정책이 도시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은 사회복지 혜택이 도시 노동자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노후보장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농민들이 믿을 거라고는 아들밖에 없는 것이다. 아울러 린 마을에서 산아제한정책을 강제집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갖가지 에피소드들은 중국 정부가 인구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린 마을은 어디로? 중국은 어디로?
이렇게 린 마을은 변해 갔다. 예 서기도 변했다. 그는 린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과거의 혁명에 대한 향수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그 향수를 달래기 위해 샤먼 시내의 단골 가라오케에 가서 흘러간 혁명가요를 부르고, 젊은 여종업원과 술을 마신다. 그런 예 서기의 모습에서 지은이는 중국혁명의 마지막 장(章)을 발견한다. 마르크스주의의 형태를 띤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와 조용히 냉소주의와 기회주의로 대체되어 버린 개혁 이후의 중국에서 예 서기는, 시장의 메커니즘과 개인의 경쟁이라는 무자비한 수레바퀴에 곧 짓밟힐 운명에 처해 있는 진정한 이상주의자 중 마지막 한 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자 황수민(Huang Shu-min, 黃樹民)
1945년 중국 본토에서 태어났고, 중국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자 가족과 함께 타이완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국립타이완대학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1975년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 인류학과 교수 겸 학과장이다. 황수민은 문화인류학자로서 중국 농촌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우선적인 연구주제로 삼고 있다. 그는 다양한 중국, 즉 본토, 타이완과 홍콩의 농촌사회를 대상으로 변화하는 식생활, 영양 섭취, 그리고 건강 관리의 신앙과 실천, 고유한 지식체계, 농업의 지속 가능성 등에 대한 비교연구를 수행했다. 현지조사를 실시한 지역도 타이완(1973∼1974; 1991∼1992), 홍콩(1980), 그리고 대륙의 푸젠(1984∼1985; 1997), 산둥(1987∼1991), 구이저우(1995), 만주(1998∼2000) 등 여러 지역을 망라하고 있고, 최근에는 타일랜드 북부 지역의 중국인 공동체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Agricultural Degradation: Changing Community Systems in Rural Taiwan이 있고, 공동 편집한 책으로 Imagining China: Regional Division and National Unity와 Ethnicity in Taiwan: Social Historical and Cultural Perspectives 가 있다.
북리뷰
| 제목 | 게재지 | 글쓴이 | 날짜 |
01 | 아직도 끝나지 않은 중국대혁명 | 국민일보 | 이영미 | 2003.07.18 |
02 | 가장 소박하고 감성적인 중국현대사 | 한겨레 | 김은형 | 2003.07.19 |
03 | 대륙의 그늘이 보이는가 | 한겨레21 | 박민희 | 2003.07.23 |
04 | 中 공산당 간부가 본 마을 흥망사 | 대구 매일신문 | 정지화 | 2003.07.25 |
05 | 안팎에서 살핀 '중국 깊이 읽기' | 한국일보 | 오미환 | 2003.08.09 |
06 | 중국 농촌과 개혁개방 실상 '생생' | 한겨레 | 문현숙 | 2004.1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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