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문화사적 관점에서 조명한 세계 최초의 중국영화사." 이 책은 청말의 초기영화에서부터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1980년대와1990년대의 아방가르드 영화에 이르기까지 중국 영화의 발전과정을 정치사회적 상황과 연관지어 폭넓게 조망하고 있다.
고금의 역사가들은 역사와 단순한 역사기록과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관점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영화사를 쓴다고 할 때 거기에 자기의 관점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영화사'가 아니라 '영화의 연대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분명한 정통 '중국영화사'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일관되게 '정치사회적 관점'을 견지한다. 물론 문화사적이고 미학적인 다른 관점들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중국 영화사를 통시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사회적 관점에 치중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중국 영화사가 시작된 이래 중국에서는 항상 영화를 정치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해 왔으며, 영화 제작자들도 주로 정치적·사회적 사건이나 사상에 직접적인 자극을 받아 영화를 만들었지 예술적인 독립영화나 개인적인 세계관이 담긴 영화를 만드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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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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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가 쇠망의 길로 접어든 19세기 말, 영화는 제국주의 열강의 문화로서 중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후 중국인이 제작한 최초의 영화는 1905년에 만들어진 <딩쥔산>(定軍山)이다. 이 영화는 그저 경극 <딩쥔산>의 몇 장면을 필름에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 단순한 최초의 시도는 중국인이 영화를 새로운 매체가 아니라 단지 전통 무대극을 그대로 재현하는 도구 정도로 인식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상당 기간 동안 중국의 영화는 전통 무대극이나 연극의 하위 장르로 머물러 있으면서 독립된 새로운 예술 장르로 인식되지 못했다.
중국의 지식인들이 본격적으로 영화의 대중매체로서의 고유한 특징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5·4운동 이후부터이다. 영화는 진보적인 좌익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중국사회의 현실을 다루면서 1930년대에는 상하이 영화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 장제스의 좌익운동 탄압과 일본의 침략으로 상하이 영화계는 완전히 파괴된다. 1937년에서 일본이 패망한 1945년까지 중국에서 영화는 일본이 만주나 베이징에서 제작한 선전영화와 좌익 활동가들이 지하에서 은밀히 제작한 극소수의 항일 정치선전영화가 전부였다. 그리고 상하이 영화계의 일군의 영화인들은 공산당 지배지역인 옌안으로 들어가 1942년 마오쩌둥의 '옌안 문예강화'를 발표하고 '정풍운동'을 일으킨다. 여기에 자극받은 일부 영화인들은 마오쩌둥 노선에 충실한 영화제작을 목적으로 '옌안영화단'을 결성한다. 이후 이 교조적인 옌안 영화단의 전통은 5·4운동의 정신을 중시하는 상하이 영화의 전통과 함께 중국영화의 두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지은이는 전자를 '옌안 도그마'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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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내전에서 승리하여 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중국공산당은 영화의 대중적 선전기능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 영화를 국가의 공식예술로 삼았다. 그러나 많은 영화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인민공화국의 예술정책은 점점 경직되어 갔다. 반우파투쟁, 백화운동, 대약진운동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대중운동의 광풍 속에서 자유롭고 진보적인 상하이 영화의 전통은 사라지고 '옌안 도그마'는 더욱 획일화된 공산주의 영웅영화만을 만들어 냈다. '옌안 도그마'의 목적은 옌안 영화단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샤옌(夏衍)의 "영화는 인민교육의 도구이며, 영화제작자는 특정계급에 봉사하여야 한다.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관계없이"라는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문화혁명(1964∼1978)은 이런 옌안 전통이 극단으로 치달은 시대였다. 당시의 문화정책을 좌우한 마오쩌둥의 처 장칭(江靑)과 사인방은 이른바 '혁명모범극'을 본뜬 영화만을 제작하도록 했다.
그러나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과 1978년 덩샤오핑의 집권으로 중국은 서서히 변화를 맞기 시작한다. 덩샤오핑은 1978년 중국공산당 11기3중전회에서 탈이데올로기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계급투쟁 노선을 실용적 현대화 정책으로 바꿀 것임을 밝혔다. 이와 함께 중국의 영화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같은 해 문화혁명 동안 폐쇄되었던 중국 유일의 영화 전문인력 양성기관인 베이징영화학교가 4년제 대학(과거에는 2년제였다)으로 승격되어 다시 문을 열었다. 다시 문을 연 베이징영화학교의 첫번째 입학생들이 뒷날 중국영화의 제5세대를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의 개혁에 불과했다. 1989년 6월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는 천안문 광장의 시위를 중국정부가 유혈 진압하면서 덩샤오핑의 한계를 드러냈던 것이다. 그와 함께 당국은 영화에 대한 검열과 영화인에 대한 제재를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이 상황은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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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화사적 과정을 통해 지은이는 중국 현대사의 정치적 대중운동(특히 문화혁명)이 중국인에게 얼마나 깊은 역사적 상처를 남겼는가에 주목하고, 만약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을 통해 과거를 극복하지 못하면 중국 인민은 역사의 희생자인 동시에 공범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 그가 이 책의 약 3분의 1 가량의 지면을 할애하면서까지 천카이거(陳凱歌), 장이머우(張藝謨), 우쯔뉴(吳子牛), 톈좡좡(田壯壯)으로 대표되는 제5세대 영화를 상세히 기술하고, 장위안(張元)의 <어머니>나 국내에도 소개된 장원(姜文)의 <햇빛 쏟아지던 날들> 같은 제6세대 영화에서 중국 영화의 미래를 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문화혁명을 청소년기에 온몸으로 체험한 제5세대는 과감히 옌안 전통을 거부하고 서구의 새로운 리얼리즘 영화이론, 특히 앙드레 바쟁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이론을 받아들여 지금껏 보지 못한 강렬한 형식미를 창조했고, 테마 면에서는 뼈아픈 과거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고 더 나아가 그 비극의 근원, 곧 마오주의와 마오주의로 지탱되어 온 체제까지 문제삼음으로써 중국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로써 중국영화는 검열과 통제가 상존하는 열악한 제작환경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이후 당당히 세계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면서 가장 주목받는 새로운 아방가르드 영화로 부상했다. 끝으로 지은이는 이런 창조적 작업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정치적 통제를 가하는 현실이 개선되어야 하며, 외국의 다양한 이론을 좀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무궁무진한 중국의 신화와 전설에서 보다 다양한 테마를 발굴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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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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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본토의 영화가 서구와 미국의 주도로 들어온 반면 타이완 영화는 철저하게 일본의 식민지 영화로 시작되었다. 1923년에 타이완인이 만든 최초의 영화 <무정한 하늘>이 완성되긴 했지만 대부분의 스태프는 일본인이었고 그 내용도 일본의 식민통치를 선전하는 것이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타이완인의 생각을 표현하는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이 상황은 1949년 본토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타이완으로 건너온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국민당 정부는 중국공산당 못지않게 엄격한 검열을 실시했다. 영화를 마오쩌둥에 대항하는 선전도구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1950년대에는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거나 국민들의 정치의식을 잠재울 수 있는 수준 이하의 애정영화나 무협영화, 또는 반공 전쟁영화가 전부였다. 1960년대 들어 점차 경제 여건이 호전되면서 영화미학적으로 가치 있는 몇몇 작품, 예컨대 리한샹(李翰祥)의 <량산보와 주잉타이>(1963)나 후진취안(胡金銓/King Hu)의 <용문의 결투>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자유로운 창작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결국 한때 동남아시아 영화시장을 주름잡던 타이완 영화산업은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퇴보를 거듭하고 할리우드 영화가 타이완 영화시장을 장악하게 되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타이완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타이완 뉴웨이브 영화가 등장한 것이다. 특히 1987년 계엄령 해제와 1988년 장징궈 총통의 사망과 함께 절정을 맞이한 타이완 민주화 운동은 새로운 영화를 낳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비정성시>로 유명한 허우샤오셴(候孝賢)을 비롯하여 <결혼피로연>의 리안(李安/Ang Lee), <애정만세>의 차이밍량(蔡明亮), 그리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양더창(楊德昌/Edward Yang) 같은 감독들이 타이완 영화의 새 시대를 열었다. 지은이는 이들이 전반적으로 중국의 제5세대나 6세대에 필적할 만한 개성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현대 타이완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정교하게 영상화했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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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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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영화 역사는 영국 식민지 치하에서 시작되었다. 1896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촬영팀이 홍콩에서 처음 영화를 상영했다고 하며 1920년대 초에는 홍콩 최초의 극장이 문을 열었다. 홍콩에서 제작된 최초의 영화는 1909년 미국인 벤저민 브로드스키가 설립한 아시아 영화사에서 제작한 두 편의 단편영화이며, 홍콩이 중국 영화의 중심지 상하이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영화시장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21년부터이다. 비록 1940년대 후반까지 상하이 영화와 광저우 영화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긴 했지만 1930년대 이후 본토의 정치변화가 극심해지면서 홍콩은 수많은 영화인들의 피난처가 되면서 홍콩 영화는 전기를 마련했다. 특히 1931년 유성영화가 소개되자 전통주의 성향이 강한 광둥 성 출신 영화인들은 광둥어 영화를 하나의 장르로 확립했는데, 장제스가 광저우에서도 베이징 표준어로 된 작품만 상영을 허가하자 많은 광저우 영화인들은 홍콩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1940년대 말에는 더 많은 광저우 영화인들이 이윤을 쫓아 자본주의 홍콩을 선택했다. 이들이 만든 광둥어 영화들은 오늘날의 홍콩영화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오늘날에도 많은 홍콩 배우들은 베이징 표준어를 할 줄 모른다. <비정성시>의 남자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홍콩 배우 량자오웨이[梁朝偉/Tony Liang]가 베이징 표준어를 할 줄 몰라 허우샤오셴 감독이 주인공을 벙어리로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더구나 해외의 화교들 중에는 광둥어를 쓰는 광둥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광둥어 영화는 중국 영화나 타이완 영화보다 먼저 국제적인 감각을 갖게 되었다.
한편 1930년대에 장제스나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홍콩으로 망명한 상하이 출신의 좌익 영화인들은 1949년 이후 홍콩 정부의 조직적인 반공 선전정책으로 말미암아 설 땅을 잃고 홍콩의 스튜디오에서 점차 사라졌다. 그리하여 홍콩영화는 완전히 상업영화 일색이 되었으며, 양적인 면에서 할리우드를 능가할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특히 1970년대 초반 리샤오룽(李小龍/Bruce Lee)의 등장과 함께 홍콩 무협영화는 전세계 영화시장을 석권할 만큼 엄청난 붐을 일으켰다. 그러나 오로지 돈벌이만을 의식한 싸구려 무협영화의 양산으로 홍콩 영화는 저질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홍콩의 중국 반환이 점차 현실화되면서 홍콩영화산업은 위기를 맞았다. 이 위기가 증폭되던 1980년대에 홍콩의 뉴웨이브 영화가 등장했다. 그들이 바로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있는 쉬커(徐克/Tsui Hark), 왕자웨이(王家衛/Wong Kar-wai), 쉬안화(許安華/Ann Hui), 관진펑(關錦鵬/Stanley Kwan) 등이다. 이들은 홍콩영화의 가장 큰 특징인 상업성을 최우선시하면서도 이전의 홍콩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정치적·사회적 메시지와 예술성을 성공적으로 접목시키는 연출력을 발휘했다. 지은이는 결론적으로 만약 홍콩 영화가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에도 이런 진보적 상업화의 물결을 이어가지 못한다면 중국 영화산업에 흡수되어 독자적인 문화적 정체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저자 슈테판 크라머(Stefan Kramer)
1966년에 태어났다. 독일 보훔(Bochum) 대학과 중국 베이징 대학에서 중국학과 영화학을 전공했으며, 1996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영상>(1996)이 있으며, 천카이거(陳凱歌) 감독의 자서전 <어느 영화 감독의 청춘>과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귀주 이야기>의 원작소설인 천위안빈(陳源斌)의 <완 씨네가 소송을 걸다>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 밖에 동아시아 영화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독일의 대표적인 중국영화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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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 중국의 영화역사 재조명 | 조선일보 | 김지석 |
200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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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 중국영화 100년의 역사 정치사회학적 조명 | 문화일보 | 오애리 |
200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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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 중국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 씨네21 | 허문영 |
2000.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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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 보기 드문 역작 중국영화사 | 한국출판인회의 | 김창남 |
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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