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초우는 우리의 입장을 끊임없이 재고하게 하는 일련의 설득력 있는 논문을 통해 타자성과 다른 사회의 문제에 접근하는 비판적 전략을 제시한다.—해리 하루투니안
디아스포라란 무엇인가
'디아스포라'란 용어는 원래 유대인의 민족적 이산(離散) 상황을 뜻하는 용어지만, 오늘날에는 전쟁·식민화의 역사나 경험과 깊이 결부된 난민·이민 상황을 가리키며, 본래의 의미보다 넓은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저명한 인류학자 제임스 클리퍼드는 디아스포라는 "한편으로 국민국가/동화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긴장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토착적, 특히 자생적 주장과도 긴장관계를 갖는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디아스포라는 끊임없이 현재 살고 있는 장소와 고향/고국 사이의 뒤엉킨 긴장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디아스포라는 단순히 국경을 초월한 다른 문화와의 느슨한 절충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특정 지역의 역사나 문화의 본질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절충주의나 본질주의를 비판하고 그 두 가지를 옹호하는 근대에 대항하여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성을 갖는 개념인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레이 초우는 그야말로 '디아스포라의 지식인'이다.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홍콩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는 미국의 브라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홍콩인'으로서, 미국의 '아시아계 이민'으로서, '여성'으로서 레이 초우는 자신이 '타자'로서 응시를 받아왔던 경험에 근거하여 '타자'의 시선으로 권력자를 바라보며 당당하게 맞받아친다. "내 옷 밑에는 더 이상 드러낼 비밀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그 비밀이란 건 너의 환상일 뿐이야"라고.
지역연구와 문화연구
이 책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유산, 중국 내셔널리즘, 미디어, 교육, 문학, 섹슈얼리티, 지적 노동, 팝뮤직, 영화, 전자화된 노동 등 가히 문화정치학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영역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다양한 주제들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전세계적으로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지역연구(area studies)이다.(우리나라의 대학에도 1990년대 중반 이후 미국식 학부제를 도입하면서 과거에는 없던 국제학부 또는 지역학과들이 많이 생겨났다.) 레이 초우는 미국 대학의 지역연구가 종종 지역적·문화적 본질주의를 장려한다고 비판한다. '진정한 성질'을 결정하는 근원적인 본질을 전제로 하여 계급, 인종, 젠더 등의 문화적 맥락을 정교하게 기술하는 방식은 그 전형과 거리가 멀다고 간주되는 사물/사람을 경멸한다거나 무시하게 되는 관념을 낳기 때문이다.
한편 레이 초우는 문화연구의 특정 경향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그것은 바로 마오주의이다. 1960년대에 서양문명의 잿더미에서 태어난 마오주의는 1970년대에 중국사회가 서양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른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으며, 문화대혁명은 경제 근대화과정에서 평등하고 인민중심적이며, 공동체적인 이상을 추구했던 마오쩌둥의 관심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사례라는 생각을 서양에 퍼뜨렸다. 이 당시에는 중국의 빈곤조차도 중국인이 미국의 낭비적이고 탐욕적인 소비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았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귀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과도한 찬양은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과도한 중국멸시로 바뀌긴 했지만 마오주의는 아직도 건재하며 그 중요성은 중국 및 동아시아 연구 분야를 뛰어넘는다.
전형적인 마오주의자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자본주의에 싫증난 문화비평가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작업을 지탱해주는 것과는 반대되는 사회질서를 원하는 문화비평가이다. 따라서 마오주의자는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최고의 사례이다. 마오주의자가 원하는 것은 항상 타자 속에 위치해 있으며, 그 결과 자신이 아닌 것 또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과 찬미가 나타난다. 찬미의 대상은 종종 타자의 불행—가난이나 아무 가진 것 없는 것—이므로, 마오주의자의 전략은 주로 자신의 수사(修辭)를 가능케 해주는 물질적 힘을 수사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레이 초우는 마오주의가, 오리엔트를 타자화하는 지식체계인 오리엔탈리즘과 형제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처럼 레이 초우에게는 기존의 좌우 개념 따위는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속적으로 '타자'를 재생산하는 담론이냐 아니냐이다. 이런 담론에 끊임없이 대항하고, 엄청난 무게로 현실을 짓누르는 지배적인 담론들의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담론공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곧 문화연구에 개입하는 전술이다.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레이 초우가 소개하는 자기의 경험이 반영된 에피소드 하나는 지식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전율을 느낄 정도로 선명하게 보여준다.
베라 슈워츠는 최근에 "현대중국의 지식인은 깨어진 그릇이 되어 자신과 동포의 고난을 비탄에 잠겨 목격했다"[1989년의 천안문 사건을 말함]고 썼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적 기억에 충실하다 함은 ……지식인에게 자신이 중국의 오랜 독재와 공모관계를 맺고 있음을 인정하도록 요구한다. 이 책임감은 중요하면서도 꽤 음울하다." 이 책의 4장 <교육, 신뢰, 1990년대의 중국지식인>은 이 '음울한 책임감'을 의식하며 쓴 것이다.
이 논문은 한 학회에서 내가 불참한 가운데 발표되었다. 내 글에 대한 토론자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사람[문화대혁명을 경험한 본토의 중국인]이었다. 그 발표문에서 나는 중국어를 번역하면서 실수를 하나 저질렀다. 이 실수를 꼬투리 잡아 그 토론자는 논문 전체를 쓰레기로 취급하면서 청중에게 결국 "그녀는 홍콩 출신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이처럼 나의 지리적 기원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표명한 배후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식민지 홍콩에서 온 이 서양화된 중국여성, 이 문화적 사생아가 어떻게 중국과 중국지식인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는가? 만약 내가 중국을 대표한다거나 진정한 중국인이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면 수치심에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숨어 있는 문화적 폭력을 누구보다 빨리 인식했어야만 했다. 중심주의적인 거대한 억압을 경험하며 살아남아야 했던 그와 같은 사람이 그런 중심주의의 영속화에 그토록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현대중국과 오늘날 그 밖의 모든 지식인이 도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전략화된 현실의 으뜸가는 예이다.
세계화와 글로벌 스탠다드를 외치는 우리의 주변에도 이런 문제는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범람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타자—여성,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실업자, 특정지역, 그 밖의 수많은 소수자—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리고 미셸 푸코의 말처럼 지식인을 권력의 대상이자 도구로 전환시키려는 권력형태에 맞서서 저항할 수 있는 지식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스스로를 지배권력에 대항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지식인조차도 자신의 학식과 말을 통해 또 다른 형태의 지식권력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이 우리에게 권력과 헤게모니의 중심을 해체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19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했던 사르트르의 지식인론을 훌쩍 뛰어넘고 1990년대에 큰 반향을 일으킨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식인론을 한 단계 끌어올린 지식인론으로도 읽히는 까닭은 우리 사회에서 '디아스포라의 지식인'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은 아닐까?
저자 레이 초우(Rey Chow)
1957년 홍콩에서 태어났다. 홍콩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네소타 대학과 캘리포니아 대학(어바인) 교수를 거쳐 현재 미국 브라운 대학 교수이다. 전공은 미디어론과 비교문학. 저서로는 현대 문화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은 <디아스포라의 지식인> 외에 국내에 소개되어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원시적 열정>(2004), Woman and Chinese Modernity (1991) 등이 있다.
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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