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일 일요일

이산의책42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후쿠자와 유키치/ 허호 옮김
2006.3.17/A5신/376쪽/19,000원
/ISBN 89-87608-53-0


일본의 근대화와 문명개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봉건제도와 봉건적 관습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중국과의 인연(한학 및 유교)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서양의 새로운 학문과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일본을 서양열강에 뒤지지 않는 강국으로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친 후쿠자와의 노력과 그의 내면세계를 알 수 있는 일본 전기문학(傳記文學)의 백미이다.

‘문명개화’의 선구자
근대 일본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빠뜨려서는 안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이다. 그는 19세기의 일본에서 번역가, 문필가, 계몽사상가, 교육자, 언론인으로서 빼어난 업적을 남겼다. 번역가로서는 많은 번역어를 만들어냈으며, 문필가로서는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된 다수의 책을 썼고, 계몽사상가로서 대중 계몽에 크게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일본 최초의 사립학교인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를 설립하여 일본의 근대화를 선도할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간하여 언론인으로서도 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가 만들었던 번역어들―civilization=문명, enlightenment=개화, speech=연설, competition=경쟁, copyright=저작권 등등―은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까지도 사용하고 있고, 그의 저작들은 현재 일본에서 근대의 고전으로 끊임없이 읽히고 있으며, 게이오기주쿠는 일본의 명문 사립대학인 게이오기주쿠 대학으로 발전했다. 또한 그의 사상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의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었고, 『지지신보』는 『산케이 신문』(産經新聞)으로 그 명맥이 이어졌다. 일본 근대화의 주역들, 더 엄밀히 말하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주역들이 일본 군국주의의 부침과 함께 명멸해 갔지만 평생토록 현실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만은 일본에 ‘문명개화’를 가져온 선구자로서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간직하고 있다. 일본에서 현재 통용되고 있는 만엔 권 지폐에 인쇄된 그의 초상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인간적인 면모
이 책은 한 인간으로서 후쿠자와 유키치가 살아온 인생을 직접 구술한 것을 기록한 자서전이다. 후쿠자와는 이 자서전에서 막부 말기와 메이지 시대로 이어지는 근대 일본의 격동기를 헤쳐나가면서 자신의 뜻한 바를 하나하나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회고하고, 자신의 정치관과 경제관 그리고 사생활에 관해서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후쿠자와는 대단히 열정적이고 자존심이 강하고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고 무슨 일을 하든 인내심을 갖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주불사의 술고래였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화들도 대부분 술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나중에 크게 결심하고 술을 끊긴 하지만 아무튼 술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임을 후쿠자와는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후쿠자와 집안의 가풍이나 자신의 자녀교육관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당시의 세태를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후쿠자와 시대 역시 부모들의 교육열이 대단했던 모양인데, 후쿠자와는 자신이 글을 비교적 늦게(열서너 살 때부터) 배우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보다 빠르게 한문과 네덜란드어와 영어를 익힌 경험이 있어서인지 기본적인 예의범절과 예능 교육 외에는 조기교육에 반대하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낳은 9남매에게 건강하게 자라기만을 바랐지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일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국가 관리가 되어 편하게 살려고 시험공부만 한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의 경제관념이다. 그는 이론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생리나 돈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요즘식으로 말하면 재테크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쓸데없는 지출은 최대한 줄이면서도 꼭 필요한 때는 과감히 썼으며, 남에게 돈문제로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줄 돈은 주고 받을 돈은 받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근대인’으로서 후쿠자와 유키치
이런 인간적인 면면들 외에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후쿠자와가 양이론과 쇄국이 대세를 이루던 시대에 왜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서양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가난한 하급무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후쿠자와는 봉건적인 신분제도에 반감을 갖게 되었고 문벌제도라는 악습의 근원이 한학(漢學)에 있다고 판단, 이를 타파하기 위해 서양학문에 뜻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평생을 일본의 근대화, 즉 일본의 서양문명화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그리고 그의 궁극적인 꿈은 일본의 부국강병이었다. 일본이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부강한 나라가 되어야만 후손들이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거두절미하고 이것만 보면 지구상의 모든 국민국가가 똑같이 산출하는 내러티브를 후쿠자와는 공유하고 있었다. 이런 논리는 일본을 군국주의로 몰고 간 정치인과 군인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꿈은 같았을지언정 그는 결코 현실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는 메이지 시대 정치가들의 부도덕성과 이중성을 혐오했고, 관료사회의 획일성과 안하무인적인 행태에 고개를 돌렸다. 결국 자신의 지식과 학문 그리고 명망을 등에 업고 정계나 공직에 진출하지 않고 초지일관 재야의 사상가로 남아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살기를 고집했기에 후쿠자와는 오늘날에도 일본의 과거사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인물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국강병은 근대의 양면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논리이며 그런 점에서 후쿠자와는 일본의 과거사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롭지는 못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후쿠자와가 세상을 떠난 1901년 이후에 약 반 세기에 걸쳐 진행된 일본의 역사를 염두에 둔 평가에 불과하다. 만약 우리가 후쿠자와는 왜 근대의 긍정적인 면만을 보았을까 하는 점에 주목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우리는 언외의 교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 후쿠자와 유키치

1834년 12월 12일(양력 1835년 1월 10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버지 후쿠자와 햐쿠스케(福澤百助)는 나카쓰 번(中津藩, 오늘날의 규슈 오이타[大分] 현)의 하급무사로서 유키치가 태어날 당시 오사카의 나카쓰 번 구라야시키(藏屋敷)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유키치는 1836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온 가족과 함께 나카쓰 번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1847년부터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했고 1854년에는 형의 권유로 나가사키에 유학하여 난학자 오가타 고안(緖方洪庵)의 데키주쿠(適塾)에서 난학(蘭學)을 배웠다. 1858년 에도의 쓰키지 뎃포즈(鐵砲洲)에 위치한 오쿠다이라 번(奧平藩) 나카야시키(中屋敷)에 난학 주쿠를 개설했다. 그러나 이듬해 나가사키를 방문했다가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영어를 독학하는 한편 이 난학 주쿠를 영학(英學) 주쿠로 바꿨다. 1860∼1867년에는 막부에 출사하여 번역 업무를 하는 관리로 일했다. 이 기간에 세 번에 걸쳐 막부의 해외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과 유럽을 시찰하는 기회를 얻었다. 1868년 4월 쓰키지의 영학 주쿠를 신센자(新錢座)로 이전, 당시의 연호를 따서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라고 명명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재야의 대표적 계몽사상가로서 저술과 번역 작업에 힘썼으며, 『학문을 권함』 『문명론의 개략』 같은 책을 통해 ‘독립자존’의 국민정신 함양에 의한 국민국가 형성과 대외적 독립의 달성을 제창했다. 1879년 도쿄학사회원(東京學士會院, 현재의 일본학사원) 초대회장에 취임했고, 1882년에는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간했다. 1901년 1월 25일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저작과 번역은 당대는 물론 후대의 지식인과 대중들에게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학문을 권함』 『문명론의 개략』과 더불어 이 책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일본인들의 필독서이자 애독서로 끊임없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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