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외국어로 쓰고 외국인이 외국어로 번역한, '외국인'을 위한 특별한 책.
미지의 독자에게 말걸기
국민이나 민족의 이름이 붙은 사상과 언어―중국사상, 중국어, 일본사상, 일본어 등등―가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사카이 나오키는 그런 지식의 가능성을 회의하는 입장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예컨대 일본사상(사)과 관련해서 그는 "'일본사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문제 삼는다. '일본사상'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일본사상'이라는 담론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가정이 정당한 것일까? 그리고 '일본사상'의 근거가 되는 일본인/일본문화/일본어의 균질성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일까?
일본인이나 일본어라는 균질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내부에서 일본사상이라는 역사적 연속성이 만들어져왔다는 것은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원근법적인 착각 같은 것으로 사카이 나오키는 간주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관점을 전제로 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일종의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카이 나오키는 일본어나 그 밖의 국어의 균질적 통일체를 밖으로 개방하고, 그 언어적 통일체의 사회적인 반사로서의 국민공동체 해체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다. 요컨대 일본어나 일본인이라는 환상을 드러냄으로써 언어적·사회적 잡종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런 논지에 걸맞게 이 책은 실제로 언어적 잡종성을 체현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여섯 편의 글은 모두 영어에서 일본어로 혹은 일본어에서 영어로 호환적으로 쓰였거나 번역되었다. 이것은 이 책이 균질적인 언어에 의해 지탱되는 공동성을 신뢰하지 않음을 뜻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수미일관하게 전달하는 일이 애당초 불가능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미지의 독자에 대한 말걸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 다언어성은 이 책이 한국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하지않는 외국인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는 다소 기이한 사태가 벌어지게 된 단초이기도 하다. 또한 이 다언어성 덕분에 이 책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론적으로 당대 최고 수준의 심화된 이론을 제시하는 보기 드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번역의 의미
물론 국민이나 국어 같은 균질성이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사회에서 제작된 착각이라는 논리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그런 주장이 일부에서는 거의 상식이 되다시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이런 상식을 추인하는 정도에 머물렀다면 이 책은 찬사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카이 나오키는 이 착각이 생성된 메커니즘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이론의 지평을 열었다. 그는 이 메커니즘을 '번역의 실천계'에 기초한 '쌍형상화'(cofiguration) 도식의 작용이라고 요약한다. 여기서 말하는 번역의 실천계란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 사이의 대칭적인 교환을 가능케 하는 이데올로기이며, 쌍형상화 도식은 언어나 사상이 짝을 이루는 다른 언어나 다른 사상 사이의 반사적인 관계를 통해서 형상화하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사카이 나오키가 '형상'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허구이며, 또 하나는 미래의 행동을 조직하게끔 통제적인 기능을 하는 이념이다. 예컨대 일본어가 하나의 통합된 형상으로 보이는 것은 그것과 대응하는 외국어가 이미 통합된 형상을 가진 것으로 상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어의 형상은 외국어의 형상과의 차이를 통해서 대칭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사상, 일본문화라는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이라는 균질성은 무엇의 쌍형상화인가? 그것은 바로 서양의 국민국가이며 근대화된 서양문명이다. 영국이 있고, 독일이 있고, 프랑스가 있으니까 당연히 일본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순수하고 본래적인 일본어·일본사상·일본문화·일본인이라는 통일성을 찾아내려는 문화적 국민주의가 생겨났다. 즉 서양에 대한 모방의 욕망이 일본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쌍형상화 도식의 도입은 개인이 복수(複數)의 언어공동체에 속하거나 복수의 언어 사이를 이동할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가능성을 낳는다. 개인에게 본래적인 언어 혹은 국어는 잡종적이어도 복수여도 안된다는 규범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번역의 실천계가 필요한데, 그 결과는 민족어 대 민족어, 국어 대 국어의 관계라는 쌍형상화 도식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번역은 저자와 독자의 관계를 민족 대 민족, 국민 대 국민의 관계로 만들어버리는 수단에 불과한 것일까? 사카이 나오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그 가능성을 번역자의 사회적 역할에서 찾는다. 번역자는 순수하게 말하는이(저자)도 듣는이(독자)도 관찰자(제3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번역자는 그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공존의 희망을 우리는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번역과 주체>가 지금 이렇게 번역된다는 것 자체가 나와 이 번역의 독자들 사이의 관계를 민족과 민족 사이의 관계로 만들어버리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오랜 교류를 생각할 때, 이 번역 자체가 근대의 표징(表徵)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번역이 민족과 민족 사이의 쌍형상화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 또한 나는 믿습니다. 번역자는 균질언어적으로 말할 수 없으며 번역자의 행위는 항상 쌍형상화 도식을 배반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어와 일본어라는 두 개의 민족어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양의적인 입장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번역자 덕분에, 한국인 대 미국인 또는 한국인 대 일본인이라는 식의 국민 대 국민 또는 민족 대 민족이라는 관계와는 약간 다른 관계를 독자들과 나 사이에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약간 다른 관계를 단순히 친구 사이라고 부를까 내심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자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
1946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도쿄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약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1979년 회사를 그만두고 시카고 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1980년에 석사학위를, 1983년에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시카고 대학 인문학부 조교수를 거쳐 현재 코넬 대학 교수로서 일본문학과 일본사를 가르치고 있다. 또 세계 각지의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잡지 <흔적>(Traces) 발간을 주도하며 경계를 뛰어넘는 실천적인 학문활동을 벌이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박사학위논문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Voices of the Past: The Status of Language in Eighteenth-Century Japanese Discourse (1991)가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나온 책으로는 임지현과의 대담집 <오만과 편견>을 비롯해서 <사산되는 일본어·일본인>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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