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는 많은데……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대통령제라는 정체(政體)가 생겨난 이래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힌다. 미국을 비롯해서 대통령제를 시행하는 모든 나라의 대통령들이나 장차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링컨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이나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심지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설 무렵 링컨 전기를 출판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서점과 도서관에는 어린이용에서부터 어른용에 이르기까지 링컨 전기가 수두룩하다. 이는 마치 공자를 이해하려는 열망은 큰데 정작 「논어」는 읽지 않고 공자의 전기만 보는 격이다. 전기를 읽는 것도 좋지만 어떤 인물의 참모습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고 할 때는 그 사람의 글을 읽을 필요가 있다. 게다가 링컨처럼 굴곡지고 드라마틱한 생애를 산 대통령의 전기는 그것이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닌 이상 결국에는 하나의 내러티브를 구성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링컨의 전기는 한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서 어떤 때는 내셔널 내러티브로, 어떤 때는 성서적 내러티브로, 또 어떤 때는 정의와 민주주의의 내러티브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링컨은 신화 속의 비극적인 영웅과 닮아 있다. 미천한 출신(또는 출생의 비밀), 고난의 극복, 사랑, 전쟁과 승리, 승리의 순간에 찾아온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영웅신화의 모티프와 기가 막히게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제는 신화화된 영웅 링컨을 잊고, 링컨 자신의 말과 글을 통해 그의 참모습을 찾아보자.
더 나은 번역을 위한 노력의 결실
지금까지 우리말로 번역된 링컨의 연설집은 두 종류가 나왔지만 아쉽게도 모두 절판되었다. 그런데 그 책들이 절판된 사실보다 더 아쉬운 것은 두 책이 30년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히 이와나미 문고의 일역판 『링컨 명연설집』을 중역한 책이라는 점이다. 잘된 중역은 안 좋은 원문 번역보다 나을 수 있다는 데 동의하더라도 같은 일역본의 중역이 30년 간격으로 두 번이나 나왔다는 것은 의아스럽다. 더구나 일역본이 안고 있는 한계를 그대로 답습한 채 말이다. 먼저 일역본에는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발췌 번역이 많아 글의 전모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나 더 지적하면 링컨의 저 유명한 「선거운동을 위해 쓴 자서전」(122쪽)의 경우 링컨은 3인칭 관점으로 서술했는데도 일역본에는 1인칭 관점으로 의역이 되어 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지금까지 국내에서 번역되거나 인용된 링컨의 자서전은 죄다 1인칭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의역 자체가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문제는 3인칭 관점이 1인칭 관점으로 바뀐 사실에 대한 언급이 어디에도 없다는 데 있다. 반면에 이 책의 독자들은 더 나은 번역을 위한 작은 노력들이 하나둘 쌓여서 어떤 번역의 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지를 책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링컨이 남긴 연설문과 편지 중에서 많이 인용되고 중요한 의의를 갖는 글들을 링컨의 전 생애에 걸쳐서 골고루 가려 뽑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비록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이 책 정도면 링컨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데 크게 부족함은 없을 것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그래도 링컨 당대의 정치적 현안과 역사적 상황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링컨의 연설이나 편지를 읽고 이해하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런 점을 최대한 보완하기 위해 각 글의 본문 앞에 해당 연설이나 편지에 대한 해제를 붙였고, 본문 안에서는 역사적 용어나 사건 혹은 인명이 나올 때마다 각주를 달아 설명했다. 그리고 권말에는 링컨 연보를 더하여 링컨의 일생을 연대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이 연보는 굳이 다른 전기를 찾아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실하므로 본문을 읽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연설과 편지로 만나는 링컨의 참모습
링컨의 생애 첫 연설문 「생거먼 카운티의 유권자 여러분께」에서 시작하여 죽기 한 달 전쯤에 쓴 「제2차 대통령 취임사」까지 죽 일독하다 보면 링컨이 연설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할애했는지 알 수 있다. 링컨의 연설은 단순한 정견발표의 수단이 아니었다. 때로는 간절한 호소였고, 때로는 날카로운 비판이었고, 때로는 인생고백이었고, 때로는 작별인사였다. 그는 연설계획이 잡히면 열심히 연설문을 준비했고, 설령 원고가 준비되지 않았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즉석에서 멋진 연설을 할 수 있었다. 비록 사자후를 토하며 대중을 압도하거나 선동하는 웅변가는 아니었지만 청중들은 그의 연설에 마음 깊이 감동했다. 링컨의 연설에는 장광설이나 공허한 구호 대신 겸손과 휴머니즘과 문학의 향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를 들어보자.
“우리는 적이 아니라 벗입니다. 우리는 서로 적이 되면 안됩니다. 아무리 감정이 상했다 하더라도, 우리를 묶어주는 애정의 끈을 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신비로운 기억의 현(弦)이 모든 전장과 애국자의 무덤에서부터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가정에 이르기까지, 이 광대한 국토를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이 현이 머지않아 우리의 본성에 잠재해 있는 천사의 마음으로 다시 매만져질 때, 연방을 찬양하는 노래가 힘차게 울려 퍼질 것입니다.”
링컨은 연설을 통해 늘 자신의 신념을 피력했다. 그의 신념, 즉 연방유지와 노예제 폐지에 대한 소신은 확고부동했고, 대통령이 되기 전이나 되고 나서나 한결같았다. 그러나 이 신념이 링컨만의 창작물은 아니었다. 그의 신념의 이면에는 세 가지 정신적 지주가 있었다. 독립선언서, 미국헌법, 성서가 그것이다. 링컨은 한 즉석연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이 연방을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시켰던 대원칙이나 사상이 도대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자문해보곤 합니다. 식민지가 모국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연방이 오랫동안 유지되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이 땅의 인민에게 자유를 부여했을 뿐 아니라 전 세계의 미래 세대에게 자유를 부여하고자 했던 독립선언서의 정신 덕분이었습니다.(박수갈채) 머지않아 모든 사람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부담이 사라질 것이라고, 또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부여될 것이라고 약속했던 것도 독립선언서였습니다.”
지금은 노예해방이 링컨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고 있지만, 링컨 시대의 궁극적인 목적은 연방유지였고, 그것을 위한 하나의 방책이 노예제 폐지였다. 링컨은 노예제 폐지를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하나는 전면적 노예해방, 두 번째는 노예를 해방하는 노예소유주에게 금전적 보상을 해주는 방안, 세 번째는 노예를 해외로 이주시키는 방안 등이다. 링컨은 내전을 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두 번째 방안에 가장 큰 무게를 두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전면적 노예해방을 추진하게 된다. 연방유지만을 위해서라면 노예제 폐지를 일단은 유보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링컨이 전쟁을 감수하면서 끝까지 노예해방을 관철시킨 데는 자유의 이념에 대한 개인적 확신이 크게 작용했다. 한 언론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 투쟁에서 제가 지상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연방을 구하는 것이지, 노예제를 보존하거나 폐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명의 노예도 해방시키지 않더라도 연방만 구할 수 있다면, 저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모든 노예를 해방시켜야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저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노예의 일부만 해방시키고 나머지는 그대로 둠으로써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역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가 노예제나 유색인종에 대해 어떤 일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연방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상은 직무상의 의무에 대한 저의 생각에 따라서 저의 목적을 밝힌 것입니다. 끝으로 제가 때때로 표명해온 저의 개인적인 소망, 즉 모든 사람이 어디에 있든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링컨 따라하기에서 링컨 넘어서기로
링컨은 변호사 업무와 정치활동으로 바쁜 와중에도 모든 연설문을 직접 공들여 집필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계속 그렇게 했다. 링컨의 말과 글은 늘 일관성이 있고, 합리적이었으며, 현실적이었다. 비전의 제시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장밋빛 전망도 간혹 이야기했지만 보통은 절제하는 편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확실히 링컨은 시류에 편승하는 대다수 정치인과는 격이 다른 인물이었다. 링컨 이후 그에 비견될 만한 대통령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그의 위대성을 자꾸 현재화하다 보면 수많은 전기들이 말해주듯 이런저런 담론만 양산하게 된다. 진부한 말이 될지 모르겠으나, 이제 링컨의 인격은 링컨이 쓴 글에서 찾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래야만 링컨 따라하기가 아니라 링컨 넘어서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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