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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국을 찾아서』『천안문』『강희제』등의 저자 조너선 스펜스의 청년시절 역작.
명말부터 현대까지 350년 중국역사에 족적을 남긴 서양인들. 선교사로, 군인으로, 용병으로, 의사로, 행정관으로, 번역가로, 교육자로, 엔지니어로, 직업혁명가로 중국에 와서 자기 생애의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을 중국에 바친 서양인 고문 16명의 영광과 좌절의 이야기. 외교관계는 당사국이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일단 공식적으로는 호혜평등을 대전제로 해서 성립한다. 강대국이라고 약소국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든다면 국제질서 자체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엄연히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이 같은 딜레마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안은 강대국이 표면적으로는 약소국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즉 약소국이 강대국의 시스템에 적응하도록 점진적인 근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 일을 수행하는 존재가 바로 ‘서양인 고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양인 고문’을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쯤으로 비하하거나 일축해서는 안된다. 역사는 인간의 의지나 상상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예측불가능하다. 근대중국은 그것을 생생하게 증언해준다. 의사 노먼 베순을 비롯한 중국의 서양인 고문들 중국에는 이미 17세기부터 서양인 고문이 있었다. 아담 샬과 페르비스트 같은 예수회 신부들이 그들이다. 원래 이들은 가톨릭을 전하기 위해 중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청조가 이들에게 벼슬과 봉급을 주고 이들을 고문으로 삼은 것은 이들의 종교에 감화되어서가 아니라 이들의 뛰어난 자연과학 지식(특히 천문학 지식) 때문이었다. 예수회 신부들은 자신의 자연과학지식과 기술이 선교의 훌륭한 도구가 될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으나 그 믿음은 깨지고 말았다. 선교는 못하고 흠천감에서 중국황제를 위해 평생 천문학 연구만 하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청조가 내우외환에 빠져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19세기에는 서양의 침탈이 본격화되었다. 이와 함께 서양 열강의 이권 보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재(在)중국 서양인 고문들의 활동도 활발해진다. 프레더릭 타운센드 워드와 찰스 고든 같은 군인, 중국해관의 총세무사 호레이쇼 넬슨 레이와 로버트 하트, 교육자 겸 번역가로 활동한 W.A.P. 마틴과 존 프라이어는 모두 중국 관료사회의 일원이 되어 부와 명예를 꿈꾸었다. 반면에 봉사활동에 전심전력을 다한 고문들도 있었다. 피터 파커와 데이비드 흄은 병원을 설립하여 의료선교와 의료인 양성에 몰두했으며, 캐나다인 의사 노먼 베순은 중국공산당군의 의료고문이 되어 부상병을 치료하며 자신의 생명을 불살랐다. 미국인 엔지니어 올리버 토드는 황허 치수사업과 중국 오지의 도로건설에 청춘을 바쳤다. 서양인 고문들 중에는 직업 혁명가도 있었다. 스탈린의 특사 미하일 보로딘이 그 사람이다. 1937년,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국민당정부를 충칭으로 옮긴 이후 장제스는 미국의 군사경제원조에 의존하여 정권을 유지했다. 미국은 장제스가 미국의 원조 아래 군사를 현대화하고 내정개혁을 단행하여 일본군을 물리치길 원했기 때문에 막대한 차관과 원조를 제공했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을 거쳐 국공내전과 장제스의 패배에 이르기까지 클레어 리 셔놀트, 조지프 스틸웰, 앨버트 웨더마이어 등을 군사고문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이들 군사고문과 장제스의 관계가 평행선을 그으면서, 결국 장제스는 마오쩌둥에게 패하여 타이완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승리한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소련의 과학자와 기술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소련의 군사적 야망과 중국의 핵개발 야욕이 충돌하면서 중소관계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이후 1960년대 후반 자력으로 일련의 핵실험에 성공한 중국은 마침내 서양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듯이 보였다. 서양인 고문의 실패 중국의 서양인 고문들은 그들의 전문분야가 무엇이든 관계없이 나름대로 중국의 진보를 돕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을 중국에 바쳤고, 심지어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과 선의는 중국인에게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중국인의 눈에는 그들이 우월감에 사로잡혀 자기만족을 위해 중국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면 사실이었다. 중국공산당군 부상병들을 돌보며 자신의 생명을 불사른 노먼 베순 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애당초 그는 공산주의 이념을 위해 중국에 온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중국에 왔기 때문이다.(만약 중국공산당에 기여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그렇게까지 과로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중국인에게 진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보다 그들을 더 참담하게 만든 게 있다. 그들은 이것을 인생 말년에야 깨달았다. 그것은 그들이 중국을 이용한 것처럼 중국도 그들을 이용했다는 사실이었다. 즉 중국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들을 고용하여 적당히 봉급을 주고 이용하다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사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외국에 대한 중국의 이런 태도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통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서양인 고문들이 실패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중국인에게 비중국적인 가치를 주입할 수 없었다. 단적으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라는 근대중국의 대표적 라이벌에게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상반되는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행태를 보였다. 장제스는 미국의 원조를 받으면서도 그 원조를 미국의 의도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완강히 거부했고, 마오쩌둥 역시 소련의 원조를 받으면서도 소련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교조주의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내용은 아니지만 이런 중국식 태도는 오늘날 북한의 핵개발과 외교방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 책은 중국의 서양인 고문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기도 하다. 오늘날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것은 누구에게나 이제 낯설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중국의 서양인 고문들은, 그 외국이 어디이든 최소한의 문화적 접점을 찾아 서로 오해하지 않으려는 부단한 노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지은이 조너선 스펜스(Jonathan D. Spence)미국 예일 대학 역사학과 교수이며, 현재 미국 중국사 학계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이다. 1936년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윈체스터 대학과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다. 1959년 예일 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1965년에 역사학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구겐하임 펠로십, 맥아더 펠로십, 라이오넬 겔버상 등을 수상했으며, 미국예술과학원과 미국철학협회 회원이다. 역사와 문학을 접목한 그의 독특한 역사서술방식은 연구자와 일반 독자 모두를 사로잡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가 쓴 책으로는 『현대 중국을 찾아서 1·2』 『천안문』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칸의 제국』 『강희제』 『왕 여인의 죽음』 『반역의 책』 등 10여 권이 있다. 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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