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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은 중국역사상 최초의 서민황제였다. 서민이었을 때 황제인 양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비극이 기다리게 되고, 황제가 되었을 때 서민인 양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더 큰 비극이 기다리게 된다.”
이 책은 유방의 생애, 탄생에서 성장기를 거쳐 최대의 라이벌 항우를 물리치고 한(漢)제국을 건설하기까지의 과정을 역사의 전체상과 맞물리게끔 치밀하게 묘사한, 근래에 보기 드문 발군의 역사서이다.
항쟁의 역사와 유방의 생애를 복원한 발군의 역사서
초한(楚漢) 항쟁의 두 주역 항우와 유방의 이야기는 중국역사상 가장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며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초한지’라는 제목의 역사소설과 만화가 한때 낙양의 지가를 올린 적이 있었고, 이웃 일본에서도 일본역사소설의 대가 시바 료타로가 쓴 『항우와 유방』이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초한항쟁의 역사를, 중국을 넘어서 동아시아 3국의 대중이 즐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초한항쟁의 역사가 야구로 치면 9회말 2사 이후에 터져 나온 역전 만루홈런처럼 극적일 뿐만 아니라 유방과 항우를 비롯한 양진영 인물들의 개성이 저마다 너무나 독특해서 끊임없이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항우와 유방 두 사람은 그들의 장점은 말할 것도 없고 단점조차도 후세 사람들을 매료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또는 사실로 믿고 있는 이야기가 실제 역사는 아니다. 인구에 회자될수록 그만큼 많은 가공의 요소가 더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더구나 초한항쟁기는 지금으로부터 2천2백년도 더 된 고대의 역사이다. 우리도 익히 경험한 바 있지만 고대사는 사료의 절대량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왜곡되는 일이 많다. 따라서 삼척동자가 다 아는 유방이라 할지라도 그 역사적 실체를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동안 잘못 알려진 사실이나 제대로 알지 못했던 점이 적지 않다.
다행히 우리는 『사기』라는 위대한 역사서 덕분에 비교적 상세하게 이 시대와 유방의 생애를 들여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또다시 주의해야 할 것은 『사기』의 기록 역시 왜곡이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사기』 이래 중국의 정사(正史)는 승자의 관점에서 고쳐쓴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전승이나 사료상의 문제까지 바로잡으면서 유방의 생애, 구체적으로는 탄생과 성장기를 거쳐 최대의 라이벌 항우를 물리치고 한(漢)제국을 건설하기까지의 과정을 역사의 전체상과 맞물리게끔 치밀하게 묘사한, 근래에 보기 드문 발군의 역사서이다.
유방이라는 인물
소설이나 극화된 형식의 이야기를 보면 십중팔구 유방보다는 항우가 훨씬 매력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대일로 비교하면 유방은 애당초 항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집안, 외모, 무술, 학력 그 어느 것에서도 항우는 유방을 능가했다. 항우가 귀족이었던 반면 유방은 ‘세미’(細微) 즉 보잘것없는 신분이었다. 또 키가 약 180cm였던 유방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거구였지만, 190cm에 달하는 항우 앞에서는 작기만 했다. 실제로 유방은 그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거만했지만 항우를 보면 두려움을 느꼈다. 힘과 무술 역시 유방은 항우에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항우가 후세 사람들로부터 많은 흠모를 받게 된 데는 그의 문학적인 재능도 한몫했다. 항우에게는 술을 마시며 시를 읊는 낭만이 있었던 반면, 유방은 주색을 밝혔을 뿐 시를 쓸 줄도 낭만도 몰랐다.
그러면 어떻게 유방은 항우를 이길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다른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범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리더십이었다. 그는 자신의 승인(勝因)을 직접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군영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 리나 떨어진 전장에서 승리를 얻는 능력에서 나는 장량에게 미치지 못한다.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고 백성을 어루만지며 군수물자 공급을 확보하고 그 안정적인 수송을 실현하는 능력에서 나는 소하에게 미치지 못한다. 백만 대군을 지휘하여 적과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적의 진영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는 점에서 나는 한신에게 미치지 못한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천하의 인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세 사람의 위에 서서 그들을 기용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은 이유이다. 항우는 범증이라는 오직 한 사람의 걸출한 신하조차 잘 쓰지 못했다. 이것이 그가 나에게 진 이유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리더십의 바탕에는 천성적인 명랑활달함과 임협(任俠)적인 기질이 깔려 있었다. 임협적인 기질이란 간단하게 설명하면 절개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는 호기로움이다. 고대 중국에서 이런 기질의 극치를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자객이다. 물론 유방은 자객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어릴 적부터 이미 친구들과 임협적인 인연을 맺고 있었고, 패현의 대협(大俠)으로 일컬어지는 여공(呂公)의 사위가 됨으로써 당대의 임협집단과 관계를 텄다. 유방의 뛰어난 점은 그의 임협적인 기질에도 불구하고 임협사회에 안주한 것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자기 밑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두목과 부하 사이의 임협적인 연계와 비슷한 관계를 일상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구축하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상대방에게 자기를 지칭할 때 상대방의 나이에 상관없이 ‘내공’(乃公) 즉 ‘자네의 아버지’라고 하고, 툭하면 ‘욕’을 해댔지만, 그의 거만함이나 욕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존의 예의를 무시하는 그의 언행은 그 나름의 친밀함과 격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교묘하게 자기의 우월성을 확고히 해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유방은 “어질어서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며, 성격이 활달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분명히 동료들에게 아낌없이 선심을 베풀고 그들을 아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어디까지나 그의 동료이자 부하였기 때문이다. 부하에게 잘해주고 싶어하는 유방의 마음에는 진정성이 담겨 있었지만 만약 그들한테서 일단 반항의 기미가 보이거나 반항의 가능성이 환경으로 조성된다면,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제거했다.
유방의 역사적 유산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인물은 진의 시황제이지만, 중국적인 것의 원형은 사실상 한(漢) 왕조의 성립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역사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실체적 다원성과 관념적 통일성,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의 불안한 공존이 한대부터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유가사상이 통치이데올로기로 채택되어 유교로 격상된 것 역시 한대의 일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이후 2천년 이상 동안 지속되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를 규정하는 질서로 군림하게 되었다. 유방은 이런 시스템의 기틀을 마련한 최초의 한족(漢族) 황제였고, 유교정치의 이상인 덕치를 구현한 황제의 전범 같은 존재로 칭송을 받았다. 그는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비범한 정치가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천하의 판세를 읽는 천부적인 감각과 일종의 보스기질에 의지한 그의 리더십과 정치행위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정리(情理)가 이성적인 판단보다 앞서는 독특한 정치문화를 낳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관시’(關係)나 우리나라의 온갖 ‘연’(緣)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따라서 유방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모범적인 위정자인 동시에 반면교사이다.
저자 사타케 야스히코(佐竹靖彦)
1939년 일본 오사카(大坂)에서 태어났다. 교토(京都)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카야마(岡山) 대학 강사, 도쿄도립(東京都立) 대학 조교수, 교수를 거쳐 현재는 같은 대학 명예교수이며, 국제학술잡지 『중국사학』(中國史學)의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그동안 프린스턴 대학·컬럼비아 대학·파리 제7대학 방문교수, 뉴욕시립대학·베이징 수도사범대학 교환교수, 베이징 대학 객원교수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양산박』(梁山泊), 편저서로 『중국사학의 기본문제』(中國史學の基本問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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